공약지키되 「포로」 안돼야(김영삼정부의 과제: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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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실현성 없는 것은 과감히 포기/국민 이해구하고 완급 조절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취임을 전후해 언론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가 선거기간중 내놓은 공약을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잇따라 뒤집었기 때문이다.
그는 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선뒤 속출하는 아이티 난민의 망명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금세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는 중산층 세금감면을 공약해 이들의 표를 대거 흡수했으나 당선후 재정적자 누증을 들먹이면서 「없던 일」로 치부해 버렸다.
그는 또 군사비 삭감 등 상당수의 공약을 축소 달성하거나 깨뜨릴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후보로서는 느낄 수 없었던 냉엄한 현실을 인식한 클린턴은 여건상 아예 실천불가능하거나,고지식하게 약속을 이행할 경우 문제를 일으킬만한 공약들은 과감히 버리겠다는 배짱이다. 그는 선거공약을 너무 충실히 지키려는데만 집착해 큰 것을 잃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우를 염두에 넣고 있는 것 같다.
○내놓은 공약 백여개
김영삼대통령은 「신한국 창조를 위한 실천약속」으로 77개 공약을 발표했으며 유세때 제시한 지역개발 다짐까지 추가하면 1백개가 넘는 공약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들 공약이 모두 진선진미하거나 실현가능성이 있는 공약이라고는 할 수 없다.
최광외대교수(경제학)는 특히 취임 2년내 물가 3% 수준안정과 국제수지 흑자 달성 등의 공약과 관련,『이는 경제체질 강화에 따른 결과적 개념으로 그 자체를 목표로 세워 달성을 무리하게 추진하면 수치적으로는 성공을 거둘지 모르나 경제 전반은 크게 멍들 가능성이 높다』고 「지표 숭상적」 발상에 우려를 나타냈다.
선거기간중 한국정책학회의 「민자·민주·국민·신정 등 4당 정책공약 토론회」에 참여,4당공약을 총괄적으로 분석했던 김석준이대교수(행정학)도 김 대통령 공약가운데 문제될만한 것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먼저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과 관련해 쌀개방을 대통령직을 걸고 막겠다고 한 약속은 앞날을 멀리 내다보지 못한 단견으로 훗날 상황이 바뀔경우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각종 대통령직속위원회 설치 공약도 옥상옥인 것들이 많아 예산낭비를 초래할 우려가 있으며 물가안정과 경제회복,각종 투자와 세금감면 등 상충되는 약속이 적지 않아 정책추진과정에서 혼란과 잡음이 생길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김 대통령의 공약은 이밖에도 교육의 질 향상,대졸 실업자 해소 문제 등에 대한 대안없이 졸지에 대학문호를 대폭 개방하겠다는 대입제도 개선공약 등 무리한 것들이 꽤 많다. 그러나 아직까지 김 대통령이 이같은 공약을 재검토하겠다고 시사한 바는 없다.
○냉철한 현실 진단을
원칙적으로 공약은 지켜져야 한다. 또 지키려는 의지도 필요하다. 그러나 공약의 포로는 되지 말아야 한다. 현실을 냉철히 진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 표가 아쉬운 후보때는 실현·타당성을 따질 겨를도 없이 솜사탕같은 레토릭(수사)을 내뱉기 쉽다.
특히 우리의 경우 정책정당이 발달하지 못하고 유권자들도 지역·집단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같은 풍토가 만연해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면 후보와 다른 면모를 보여주어야 한다. 막중한 국정을 떠맡게 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더이상 수사의 세계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나라를 둘러싼 현실을 철저히 해부해야 한다.
또 이에 기초해 후보때 내놓은 공약을 총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무리하게 추진할 경우 큰 부작용을 일으키거나 진짜 실현불가능한 것들은 욕을 먹더라도 용기있게 포기하거나 축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클린턴처럼 맞을 매는 빨리 맞고 지나가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 대신 국민들에게 위약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솔직히 설명하고 이해를 반드시 구해야 한다.
○우선 순위따라 실천
그렇다고 굴절된 역사를 통해 굽고 휘기도 한 현실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개혁하는 것까지 포기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공약의 옥석과 선후완급을 가려 꼭 추진해야 할 것은 시간계획을 정해 강력히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카터처럼 공약을 매우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지난달 8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총 4백59건의 공약중 손을 못댄 것은 8건에 불과하므로 이 정도면 국민과의 약속은 제대로 지켰다고 생각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도 카터처럼 공약 이행상 많은 비판을 받았고 큰것을 잃는 우를 범했다.
예컨대 노 전 대통령은 주택 2백만호 초과달성을 큰 업적으로 내세우지만 역사는 억지춘향식의 무리한 추진으로 빚어진 불량건축·자재파동·물가상승 등 부작용에 대한 평가도 함께 내릴 것이다. 또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중간평가같은 중요한 공약을 결국 지킬 생각이 없음에도 지킬양 1년여이상 모호한 태도를 보여 정국을 한층 혼란으로 몰고간 행위는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
지자제 문제를 포함한 노 전 대통령의 공약 이행상 여러문제는 김영삼정권에 충분한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김 대통령은 공약실천의 중요성·실현가능성·완급의 필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실행해야 할 것은 우선 순서를 두어 반드시 매듭짓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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