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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교민족주의 목소리 커져 "몸살"|세계적 혼란의 진원지 중앙아 5국|모스크바=김석환 특파원 제5신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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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타지크한인들의 수난소식과 함께 중앙아시아가 우리의 관심권으로 성큼 다가섰다. 특히 장기내전에 휘말린 타지크를 비롯, 카자흐·우즈베크·키르기스·투르크멘 등 구 소련에 속했던 중앙아시아 5개국은 가난과 일제의 만행을 피해 연해주로 건너갔던 한인들이 1930년 대말 일제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강제추방 된 곳인데도 냉전의 장벽 때문에 반세기동안 우리의 관심권 밖에 놓여 있었다. 80년대 후반 한 소 교류의 물꼬가 트임에 따라 그곳에 뿌리내린 30만 명 안팎의「잊혀진 동포들」과 함께 우리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중앙아 5개국은 그러나 내외적 요인들이 뒤엉켜 또 다른 세계적 혼란의 진원지로 떠오르고 있다. 중앙아 5개국의 현황을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편집자 주>
투르크 제국과 페르시아왕국(타지크)의 영향권 하에 있던 중앙아5개국은 19세기중반 크림전쟁에서 제정러시아가 투르크제국 등 연합군에 패배, 영토확장의 고삐를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쪽으로 돌리며 러시아 군에 짓밟히게 됐다. 이른바「루스코에 이고(러시아인의 굴레)」 의 시작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 전후 제정러시아가 붕괴되고 소련이 건설되는 과도기를 틈타 중앙아5개국은 몇 년 동안 독립을 맛보기도 했으나 소련이 국가의 기틀을 잡아가자 다시금 루스코에 이고에 걸려들었다. 우즈베크(1922)를 필두로 한 중앙아5개국의 소련편입은 1936년 카자흐와 키르기스를 끝으로 완성됐다.

<소수민족 추방 지>
소연방 하에서 중앙 아는 50여 년 동안 제정러시아시대에 못치 않는 민족적 차별과 경제적 수탈의 제물로 전락했다. 특히 요시프 스탈린은 못미더운 소수민족들을 중앙 아의 황무지로 대거 추방, 갇혀 살게 하는 등 중앙 아를「민족의 쓰레기장」으로 간주했다. 연해주 한인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볼가 강 유역과 흑해연안에 살던 독일계 주민 수십만 명이 1941년 독- 소전 발발직후 이곳으로 추방됐고 크림반도에 수백 년 동안 터를 잡았던 크림타타르 인들도 나치 독일 군에 협력했다는 올가미를 쓰고 2차 세계 대전 말 민족의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중앙 아의 민족구성이 복잡해진 것은 이 때문이다.
경제적 수탈은 91년 말 현재1천 루블 안팎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 등 슬라브 계 공화국의 절반수준을 맴돌고 있는 중앙아5개국의 1인당국민소득이 증명하고 있다. 현대화의 지표로 흔치 사용되는 인구의 도시집중도면에서도 중앙 아는 카자흐만 겨우 50%를 넘었을 뿐 나머지 4개국은 32%에서 45%로 슬라브 계 공화국, 발트해연안3개국(70∼80%)은 물론 아제르바이잔 등 카프카스 3개국(55∼60%) 에도 훨씬 못 미치고 있다. 중앙 아는 지역적 특화를 내건 소연방정부의 경제발전원칙에 따라 주로 면화생산 등 농업분야에 치중됐다. 우라늄·석유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상품화하고 이익을 챙기는 쪽은 주로 러시아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누적된 중앙 아의 분노가 곪아터지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 지방분권화를 포함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 소련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부터다. 이들은 종교·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탈 소 독립을 위한 연대투쟁을 벌여 결국 91년 말 구 소련의 해체와 함께 완전독립을 달성했다.
그러나 독립의 기쁨도 잠시, 중앙아는 곧 새로운 혼란에 빠져들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주민대다수를 차지하는 회교도를 파고들며 세력을 넓혀온 회교민족주의자들은 루스코에 이고로부터 벗어나는데 만족하지 않고 중앙아 지도층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구 공산당지도자들에게 도전했다.「죽은 체제(공산체제)의 생존자들」과 회교민족주의자들의 권력투쟁은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특히 타지크에서 91년8월 구 소련보수파에 의한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뒤 소속공화국들이 일제히 개혁노선을 걸은 것과는 정반대로 타지크공산당 제1서기를 지낸 라흐몬 나비예프가 개혁파지도자 카드레닌 아슬로노프를 몰아내고 권좌에 복귀함으로써 회교민족주의자들과 개혁파가 공동전선을 형성, 무력을 동원한 대 정부 투쟁을 벌이는 빌미를 제공했다.

<러인 보호 골머리>
지난해 4월 타지크남쪽 아프가니스탄이 L년여에 걸친 내전 끝에 회교도수중에 떨어지자 더욱 기세를 올린 회교도·개혁파 연합세력은 친 공산 집권세력과 수도 두샨베를 뺏고 뺏기는 공방전을 거듭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군의 출병으로 친 공산세력이 두샨베 등 도시지역을 장악한 가운데 회교도·개혁파 연합세력이 농촌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호시탐탐 도시지역을 넘보고 있는 상태다.
내전소용돌이에 휘말린 중앙아시아 타지크의 한인들에 대한 안전대책마련에 한국정부가 부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타지크거주 러시아인 보호를 위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러시아는 이미 모스크바 북부 칼리닌그라트와 남부 보로네슈·칼루가 세 곳 인근의 시골지역에 1만 명 거주 규모의「타지크러시안 정착촌」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그렇다고 타지크러시 안들이 그곳에서 당장 새 삶을 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말뚝만 박아 놓은 맨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타지크러시 안의 엑소더스는 지난해 4월 타지크남쪽 아프가니스탄이 12년여의 내전 끝에 회교도의 수중에 떨어진 것과 때맞춰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80년대 초 50만 명을 웃돌던 타지크러시 안은 이제 30여만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이들은 지정정착촌을 마다하고 속속 대도시로 몰려들어 집단난민 화하는 등 사회적 골칫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남은 사람들도 언제든 타지크를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다. 타지크러 시안협회인「옵시치나」의 발레리 유신회장은『타지크 최고회의에 상정된 신 헌법에 소수민족 보호조항이 없어 나머지 타지크러시안도 대거귀국 길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2천30만 국민 중 회교도가 80%를 웃도는 우즈베크에서도 회교열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91년2월 창당된 회교부흥 당과 이후 결성된 비를리크 당 등 회교단체들은『수년 내 우즈베크를 샤리아(회교율법)가 지배하는 알라신의 나라로 탈바꿈시킬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구 소련쿠데타 실패직후 우즈베크공산당을 우즈베크 인민민주당으로 개칭하는 등 재빨리 민족주의자로의 변신을 꾀했던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은 지난해 5월부터 인근 타지크사태가 악화 일로를 걷자 비를리크를 불법화하고 회교지도자들을 대량 투옥하는 등 위기감을 드러내고 있다. 비교적 평화롭게 민주화 과정을 밟고 있는 키르기스를 제외한 카자흐와 투르크텐에서도 사정은 대동소이하다.
그렇다고「죽은 체제의 생존자들」이 회교민족주의 열풍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혼전 중인 타지크를 제외하고 구 공산당 제1서기 출신일색인 중앙아 각국의 대통령들은 자신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일부회교세력에 대해서는 회교근본주의자로 몰아붙이며 탄압을 계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교민족주의에 영합하는 노선도취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3월과 5월 이란의 테헤란과 투르크멘의 아슈하바트에서 이란·터키·파키스탄 등과 함께 잇따라 회교권정상회담을 열어 회교권의 결속을 다졌는가 하면 지난달에는 우즈베크의 타슈겐트에서 독립국가연합(CIS)의 기존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CIS를 집단탈퇴하고 중앙아 인민연방을 결성하겠다고 공표 했다.
5천여 만 명의 중앙아5개국 총 인구 중 회교도가 70%를 넘는 데다 종교적· 민족적 감정의 폭발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던 공산이데올로기와 소연방정부의 물리 력이 사라진 이상, 회교민족주의자들이 구 공산세력을 밀어내고 대세를 장악할 날이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될 경우 배타적 결속력이 유난치 강한 회교도의 특성으로 미뤄 러시아인·한인 등비회교 이민족은 중앙아에서 배겨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 등 회교가 국교 화 된 나라들에서 이교도가 전혀 발붙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경제난 또한 중앙아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랄해로 흘러드는 강물에 의존, 사막농업을 주로 해 온 중앙아는 최근 몇 년 동안 강물이 약 70%로 줄어들고 아랄해도 고갈되고 있어 식량자급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산을 미덕으로 여기는 회교도 특유의 출산 관 때문에 중앙아는 연평균3·5%에 달하는 인구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현 추세대로라면 중앙아의 인구는 오는 2010년께 1억 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식량생산이 증가하리라는 전망은 거의 없다.

<서방, 직거래 추진>
회교민족주의가 거세지면서 러시아인 등외내인 엘리트들이 대거 중앙아를 떠나고 있는 것도 단기적이나마 중앙아의 혼란을 부채질하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다. 중앙아 각국의 행정조직은 물론 수력발전소에서 의료서비스에 이르기까지 핵심기술 및 전문분야를 독차지했던 이들의 공백을 제대로 메워 줄 토착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은 한때 50만 명을 헤아리던 러시아인들 중 20여만 명이 떠나버린 타지크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이와 함께 중앙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외세의 각축도 치열해지고 있다. 특히 터키와 이란은 과거의 연고권과 대규모 경제원조를 내세워 이 지역으로의 진출경쟁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로서는 중앙아의 회교지도자들은 터키와 같은「세속화된 회교국」을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타지크의회교도는 터키와 같은 수니파가 대다수이면서도 다른 4개국과는 달리 페르시아 왕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복잡한 과거를 갖고 있는데다 내전과정에서 이란의 공공연한 지원을 받고 있어 친 이란 화 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미국 등 서방세계는 유사시전략요충인 중앙아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란 식 회교혁명이 배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곳을 모스크바의 지부쯤으로 여겼던 종전의 방침을 수정,「중앙아와의 직거래」를 활발치 추진하고 있다. 한마디로 영국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이「위대한 게임」이라고 지칭했던 중앙아를 둘러싼 주변세력의 주도권다툼이 재개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 모스크바가 중앙아를 영향 권 하에 묶어 두려는 제국주의적 역할을 포기한 만큼 중앙아의 극단적 회교민족주의자들도 점차 쇠퇴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앙아는 4∼6년 후로 다가온 독립이후 최초의 대통령선거와 총 선을 거쳐서든, 혁명을 통해서든 명실상부한 회교국화의 길을 걸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권력투쟁과 경제난 가중으로인 한 내부진통과 이곳을 노리는 외세의 개입으로 일대 혼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으리란 것이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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