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배씨 코래드 상임고문|25년째 빠짐없이 정초산행-"설산에 가면 욕심 없어지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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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종배씨(64·코래드 상임고문)는 지난 25년 동안 새해 첫날을 한결같이 산에서 보낸 사람이다. 그는 지난 1월1일에도 어김없이 경남 거창의 기백산(1,331m)과 금원산(1,353m)을 올랐다.
이날 등산으로 이씨는 25년 연속 정초 산행기록과 함께 전국1백개산 등정, 총 1천회 산행이라는 나름대로의 목표를 달성했다.
『새해 첫날 산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5년 정도만 계속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막상 5년을 채우고 나니 욕심이 생기더군요. 이렇게 「10년·15년…」하다보니 25년을 채우게 됐습니다.』
정초산행의 출발점은 69년 계룡산 등반. 이씨는 이때 산을 오르면서 새해 첫날 「주먹만한」함박눈을 맞은 것이 매우 인상깊었다고 말한다.
이후 73년 5회째인 두타산(1, 353m·주왕산(720m)연속등반까지 그는 별 어려움 없이 산행을 계속했다.
부인 한봉선씨(60)가 『새해 첫날부터 집을 비워야 하느냐』고 못마땅해한 것도 첫해와 이듬해뿐.「이모는 새해 첫날 꼭 산에 간다더라」는 얘기가 친지·직장동료들에게 알려지면서 세배객의 발길이 뚝 끊기고, 이에 따라 손님 뒤치다꺼리가 없어지자 부인 한씨가 오히려 은근히 남편의 산행을「장려」하기 시작했다.
큰 탈없이 계속되던 정초산행이 첫 고비를 맞은 것은 7회째인 75년 덕유산(1,614m)·마이산(667m) 동시 등반때. 덕유산 등정을 끝내고 산 하나라도 더 오르려는 욕심으로 2일 마이산에 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마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미 해는 지고 서울로 올라가는 차편이 끊겼다.
당시 간부사원(H약품 광고부장)으로 시무식에 꼭 참석해야 할 형편이었던 그는 전북 임실까지 걸어나와 전주로, 다시 차를 갈아타고 대전으로, 또 다시 택시를 대절해 상경해야 했다. 동시 등반 욕심이 자칫 사표제출(?)로 이어질 뻔한 위기였다. 『계속해보니 정초산행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습디다. 한겨울에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그것도 대개 초행인 산을 오르다 보니 체력소모가 아주 심했어요. 길을 몰라 산속에서 10여시간 헤맨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정초등반은 아니었지만 85년 겨울 치악산(1,288m)등반 때는 하산중 산 중턱에서 발을 헛디뎌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10여시간을 질질 끌며 내려온 적도 있다.
그러나 정초산행의 진짜 어려움은 사전 컨디션 조절. 그는 『10월 중순부터 몸 만들기 작업을 시작한다』며 『감기나 몸살, 기타 질병·외상 등을 입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고 밝힌다.
꽤 좋아하는 술도 이즈음은 멀리 한다. 이같은 「극도보신」에도 불구, 한번은 연말에 몸살이나 링게르를 맞고 산행에 나선적도 있다.
정초산행을 포함해 1천회의 산행을 기록하기까지 이순을 넘기면서 더욱 거세지는 이씨의「산바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늦바람」이 으레 더 센 법이 아니냐』며 『아예 곱새를 벗기는 각오로 계속 산을 오르겠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가 처음 산을 접한 것은 불혹을 눈앞에 둔 지난 67년 H약품 광고부장 시절.
이씨는 당시 『산을 광고매체로 활용해야 하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서울 근교의 불암산을 자신의 처녀등반 목표로 삼았다고.
등산로 중간 중간에 회사제품 선전문구 등이 쓰여진 이정표를 세우면서 그의 산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씨는 이때 회사의 선후배들과 산 친구가 되고, 이후 광고계전반의 지인들과 산에서 교류를 계속해왔다.
정초산행에 동반하는 그의 동료는 20명 남짓. 이중에는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지만 연속산행기록은 역시 그가 최고.
그는『산 친구들이 없었다면 25년 연속 정초산행도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세상에 태어나 사귄 사람들중 산 친구만큼 좋은 사람도 드물다』고 예찬론을 편다. 원로 광고인 이종학, 과학저널리스트 현원복, 동국대 교수 황창규, 일동제약 부사장 이명환씨 등은 십수년 이상 그와 함께 산을 탄 사람들이다.
특히 이들중 동료 광고인인 이명환씨는 한쪽 다리의 불편함을 딛고 지리산·한라산·설악산을 완주하는 등 이씨에게 적지 않은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이씨는 아마추어 산악인으로 프로와는 나름대로 차별되는 등산관을 갖고 있다.
산은 동화의 마당이지 경쟁의 장이 아니라는 것. 누가 먼저·빨리·높이 오르느냐가 등반의 목표가 돼서는 안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호를 「여산」으로 할만큼 산과의 동화를 강조하는 그지만 산을 많이 오르고 싶은 「욕심」만큼은 버릴 수 없다고 털어놓는다.
그의 왕성한 산 오르기는 서울 보성고 시절 럭비로 단련한 탄탄한 근육의 도움도 적지 않지만 도박·춤·골프를 「삼불」로 삼는 생활철학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정신이 타락해서는 산과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씨가 가장 많이 오른 산은 서울의 북한산과 도봉산으로 모두 5백번 정도 올랐다고.
그는 산행을 시작하면 꼭 정상에 오른다는 원칙과 아내를 동반하지 않는 습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난 70년 제주 문화방송개국 기념식 참석차 현지에 갔다가 등산화를 사 신고 평상복차림으로 얼떨결(?)에 오른 한라산 등반은 악천후로 정상을 수십m 두고 하산해야 했던 유일한 미 정상정복 기록.
한라산은 한편으로 그가 아내와 유일하게 88년 등반했던 산이라서 이래저래 그로서는 원칙을 깨뜨린 악연(?)의 산이기도 하다.
이씨는 광고 초창기세대로 지난해 광고인으로서는 최초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 받기도 했다. 남다른 기록광인 그는 자신의 산행을 비롯해 체험한 것을 바로 글로 옮기는 습관을 갖고 있다. <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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