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동북아지역 안보/한승주(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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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세계가 전쟁과 혁명,그리고 이념투쟁으로 점철되었던 20세기의 마감이 이제 몇년 남지 않았다. 80년대 후반에 소련을 주축으로 하는 공산권이 붕괴되고 냉전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은 자유주의의 승리를 구가하고 평화로운 21세기의 도래를 예견했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으로 인류의 위해요인이 다 없어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4강관계 미묘한 기류
동서간 군사대결의 종식은 나라와 지역간의 경제전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청산은 억압되었던 민족주의의 본능을 발산시켜 옛 유고와 같은 곳에서는 민족간의 살상과 파괴가 판치고 있다. 핵무기의 확산,지역내 분쟁과 군비경쟁도 계속되고 있다. 이렇듯 세계의 구질서는 무너지고 아직 그것을 대체하는 신질서가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세계의 각 지역중에서도 우리 한국이 위치하고 있는 동북아시아는 21세기의 주역들이라고 할 수 있는 미·일·중·러의 4개 세력이 서로 마주치는 지역으로서 냉전이 종식된지 얼마 안된 지금 벌써부터 이들간에는 군사안보 면에서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우선 중국이 지난 수년간의 경제발전과 성장을 바탕으로 점차 군사력 강화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일본은 막강해진 경제력에 상응하는 안보역량과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 러시아는 긴박한 국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극동지역에서의 군사기지와 군사력을 축소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있다. 미국은 지금까지의 대소 「봉쇄정책」대신 앞으로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견제정책을 펴야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동북아시아에서 우려해야 할 것은 역시 일본의 움직임이다. 일본은 종전후 지금까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우선시 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경제적·전략적 이유로 아시아를 포함한 세계에서의 군사적 역할을 감축시킬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일본은 그것을 자국의 군사적 역할을 증대시키는 명분과 기회로 삼고있다. 더구나 걸프전쟁에서 막대한 기여금을 내고서도 실제로 군대를 보내지 못해 받은 「수모」를 되풀이하지 않기위해 일본은 해외파병의 길을 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엔기치하의 PKO 활동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되고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강정치 재현 막아야
일본이 「평화헌법」의 개정을 추진하고,다량의 플루토늄을 반입하고,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추구하고,일본군대를 필요시에 대규모로 유엔활동에 참여시키겠다고 공언하는 일­이 모든 것이 2차대전 이후 패전국으로서 강요받은 제약에서 벗어나 명실공히 강대국으로 다시 부상하겠다는 의지와 계획의 표현으로 봐야한다.
이러한 움직임이 세계 최강의 경제국이 된 일본으로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지 몰라도 세계질서,특히 동북아 질서에 큰 불안정 요인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일본이 군사경쟁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우려하는 주변국들,특히 중국과 러시아의 반응이 이 지역에서 강대국간의 긴장과 군비경쟁,그리고 주도권 다툼으로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 경제뿐 아니라 정치통합까지 바라보면서 종래의 세력균형적 국제관계를 지양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북아에서 19세기적인 열강정치가 재현된다면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강대국간의 절제없는 경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사실 우리는 지난 1백년간 열강정치의 희생자였고 지금도 민족분단의 비극을 안고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오늘의 우리는 국제적 흐름의 수동적 피해자만이 아니고 그것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우리의 대응이 우려와 규탄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전개되는 국제적 상황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찾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중의 하나는 다변적 안보협의를 활성화 시키는 일이다. 이미 아­태지역 전체로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아세안 외무장관확대회의(ASEAN­PMC)에서 군사안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아­태경제회의(APEC)에서 정치와 안보를 논하자는 제안도 나와있다. 아시아·태평양과 같은 광역의 협의활동에 보태 동북아지역에 국한되는 협의체의 가능성도 구상해볼만 할 것이다.
○지역협의체 구성 시급
이러한 안보협의체가 미국의 역할변화에 대비하는 방법이 되면서도 그것이 미군감축을 촉진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우리는 다변적 협의체 구성을 주저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협의과정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고 또 미국의 클린턴행정부도 다변적 안보협력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므로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능동적인 역할이 요구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안보문제를 대북한 관계에 국한시키는 것에서 벗어나 지역과 세계에도 관심을 갖고 지역협의와 협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가 되었다. 이것은 통일의 국제적 여건을 조성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우리가 지난 몇년동안의 성공적인 「북방외교」에 힘입어 지역과 국제협력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요건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된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고려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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