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기술­자본에 “문 활짝”/북,한국기업 경제개발 참여요청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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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요파트너 인식 대외개방 적극적/대상업체도 특정기업 탈피 다변화
북한이 당국의 이름으로 남한의 주요그룹들에 자신의 경제개발계획에 직접 참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한마디로 남한의 선진기술과 자본을 받아들이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또 북한이 대외개방을 가속화 하겠다는 신호이자 최근 남북비밀접촉설의 진상이기도 하다.
북한은 지금까지 남북교역이 엄연히 이뤄지고 있는데도 남한과의 교역 자체를 부인해왔고,개별기업의 남북경협 추진사실이 언론에 한 줄이라도 비쳐지기만 하면 「왜 일을 그르치려고 하느냐」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때문에 남한기업들도 대북교역이나 경협에 관해서는 쉬쉬해왔다.
그러던 북한이 최근에는 「왜 경협을 추진한다고 합의까지 해놓고 차일피일 미루느냐」「기왕 일을 같이 펴기로 했으면 남한 언론에 단 한줄이라도 보도해야 하지 않느냐」「우리가 남한기업들에 초청장을 보냈으니 그 사본을 언론에 한번 보도하면 어떻겠느냐」며 적극적으로 나선다는게 북한과의 교역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정도면 북한경제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적어도 남북경협에 관한 발상에서 근본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으로 봐도 무리는 아닐성 싶다.
북한이 이처럼 태도변화를 보이는 것은 대략 세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선 후계체제의 가닥을 서서히 잡아가고 있는 김정일이 경제개방과 개혁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김정일은 현재 김달현부총리겸 국가계획위원장­이성대대외경제위원회 위원장을 축으로 하는 대외경제 개방팀에 막강한 권한을 주어 당간부를 비롯한 누구에게 간섭받지 않고 외국과의 경협을 적극 추진하도록 독려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또 사실상 북한경제를 요리하고 있는 김달현부총리가 작년 7월 서울 방문직후 남북경협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점도 큰 이유중의 하나다.
이때 김 부총리는 과연 어느 기업과 어떤 형태의 경협을 추진하는 것이 북한경제에 보탬이 될까 저울질한 끝에 남북경협의 청사진을 다소 수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대우와 주로 협의했던 김 부총리는 어느 특정기업과만 경협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 아래 삼성·럭키금성 등 경협선 다변화를 추진키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경제난을 풀기위해 남북경협을 서둘러야 하는데도 남한정부가 핵문제를 거론하면서 경협을 사실상 뒤로 미루고 있는 것도 북한이 「정부」가 아닌 「기업인들」에 경협의 고삐를 바짝 죄줄 것을 채근하는 큰 요인이 되고있다.
북한이 주요기업들에 김달현부총리 명의로 초청장을 보낸 것도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그동안 남북경협의 북한측 실세가 김달현인지,아니면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회장인 최정근인사가 분명하지 않아 기업들이 혼선을 빚던 터에 김달현부총리 명의로 초청장이 온 것은 북한이 작년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한 김에게 대남경헙 분야를 일임하겠다는 뜻을 담고있다.
다시 말해 북한이 대외경제개방 방향으로 이미 가닥을 잡은바에야 남한이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남한과의 경협을 주장해온 김달현에게 일을 맡기자는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작년 7월 김달현과 함께 남한에 왔던 이성대가 북경 무역대표부 참사에서 몇단계 승진해 김이 맡았던 대외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 전격 발탁된 것은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김의 핵심측근인 이성대는 중국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남한 기업인들과 빈번한 접촉을 가졌을 뿐 아니라 중국의 경제개방 내용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는 터여서 남북경협의 적임자로 평가받아왔다.
이와 함께 북한이 과거에는 삼천리기업(박경윤)이나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 등을 통해 기업인의 방북초청장을 보냈으나 앞으로는 대남교역과 경협의 창구를 정부의 공식기구이자 대일교역을 10년 넘게 담당해온 국제무역촉진위원회로 창구를 단일화시킨 것도 큰 변화다.
이는 남한과의 교역이나 경협을 비공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식기구를 통해 공개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뜻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크게 주목된다.
이와 관련,재계 일각에서는 남북경협에 참여하는 기업들의 판도가 올해부터 달라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제무역촉진위원회를 창구로 본격적인 경협작업이 다변화 되면 대북경협의 양상도 상당히 바뀌고 대북경협 방식도 바꿔질 것이란 얘기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경제개발 계획이 어떤식으로 추진될까. 북한에서 경제개혁의 수립과 집행상황에 대한 감독은 국가계획위원회(위원장 김달현)를 중심으로해 정무원의 각 경제부서와 도·시·군 및 각 공장기업소에 이르기까지 일원화,세분화된 체계속에서 이뤄진다.
경제정책 계획단계는 대략 기본적인 계획범위의 작성→통제수치의 작성→계획초안의 작성→의사결정과 계획확정 등의 수순을 밟는다.
북한은 47년부터 1개년계획 2회,2개년계획·3개년계획·5개년계획을 1회씩 실시하다 61년부터는 7개년으로 실시해 왔으며 중도에 6개년 계획(71∼76년)을 한번 추진했었다.
김달현이 삼성그룹과 럭키금성그룹에 「내년부터 시작되는 제4차 7개년 계획에 참여해달라」고 언급한 것은 올해로 제3차 7개년 계획을 마무리짓고 내년에는 제4차 계획에 돌입하겠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무튼 북한이 최근 대남체제를 바꾸고 남한기업에 경제개발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대외개방을 수면위에 올려놓겠다는 의도로 보여진다. 현재로서는 핵문제가 최대의 걸림돌로 남아있는 셈인데 북측이 결코 이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이에 대한 타개방안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된다. 새정부도 북한의 이같은 구조적 변화를 잘헤아려 대북한정책을 펴나가야 할 것이다.<박의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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