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 (9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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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림=김태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건 내가 혹시 남자친구랑 여행을 가겠다고 할 때 해야 할 변명이 아닌가 말이다.

“엄마 다니엘 아저씨 좋지?”

내가 빙그레 웃으며 물어보자 엄마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아니, 그게…, 꼭 그렇다기보다 바닷가에 지은 집은 어떤가 보고도 싶고, KTX도 타보고 싶고, 깨가 서 말이라는 전어회도 먹고 싶고…. 꼭 아저씨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엄마는 이리저리 말들 둘러대다가, 갑자기 힘이 빠진 듯 다시 말했다. 역시 3분만 기다리면 된다. 그건, 까짓 거 컵라면이 익는 시간이다.

“… 그래 실은 좋아. 많이 좋아. 나 자신이 당혹스러울 만큼 그래. 내 평생 이렇게 좋은 사람은 처음 만나본 것 같아. 그래서 생각하기도 했지. 난 왜 이런 사람을 이제야 만나게 된 걸까 하고 말이야.”
 
엄마는 내 눈을 바라다보았다. 아마 엄마는 이럴 때 늘 내게 하는 말처럼 ‘나는 가끔 네가 딸인지 친구인지 헷갈려’ 하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건데, 이유를 두 가지쯤 찾았어. 하나는 만일 이 아저씨를 젊었을 때 만났다면 엄마는 경험이 전혀 없어서 아저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헤어져 버렸을 거 같아.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연애를 못했을 거 같거든. 그러면 너희는 안 태어나잖아. 그러니까 아저씨를 지금 만나는 게 맞는 거고…. 또 하나는 아저씨를 만났을 때 엄마는 너희 아빠를 만날 때와는 달리, 남자가 별로 필요 없었어. 예전과는 달리, 내가 남자 친구 하나 없이 이러구 살아도 되나, 뭐 이런 생각도 없었구, 엄마 혼자 스스로 행복했거든. 이게, 말이야. 이게 중요한 거 같아…. 혼자서도 스스로 만족할 때 눈은 가장 정확해지는 게 아닐까 말이야.”
 
엄마는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는데 정말로 그 눈은 만족감과 행복으로 빛나보였다. 속으로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좋으면 그냥 만나면 되는 거지, 꼭 저렇게 그 이유와 의미를 생각하고 그것을 몇 가지 조항으로 정리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고 내 방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나 역시 엄마를 닮은 딸이어서 비밀을 3분 이상 간직하지 못한다. 아니 그래서였을까. 나는 말을 꺼냈다.
 
“엄마 나는 이번 주말에 E시에 가려고 해.”
 
내가 말을 꺼내자 엄마는 심드렁하게 “그래? 한번 다녀올 때도 되었네. 할머니한테 뭐라도 좀 사서 가야지” 하고 말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아빠네 집에 다녀오려고 해.”
 
내가 말을 마치자 엄마가 놀라는 눈으로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엄마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엄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아직은 속단은 이르다는 듯했고 엄마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다시 내게 물었다.

“그래… 아빠가, 네 새엄마가 괜찮다고 하니?”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톱 끝의 거스러미를 뜯어내고 있었다. 엄마가 다시 내게 물었다.

“… 그런 거야?”
 
나는 아니,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엄마의 눈에 겁이 더럭 실렸다. 엄마는 직관적으로 이 모든 사태의 아우트라인을 예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들여다보고 있던 노트북을 닫고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엄마, 허락해줘. 한 번은 하고 싶었어. 그렇게 해야만 내가 어른이 될 수 있을 거 같았어. 나도 한 번쯤은 정말 내 멋대로라는 게 뭔지 보여주고 싶어. 하게 해줘 엄마. 가게 해줘.”
 
엄마의 얼굴이 하도 참담하게 일그러져서 나는 애원하듯 말했다. 엄마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또 저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엄마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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