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공습'(下) 3중고 겪는 한국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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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일 서울 외환은행 본점 객장에서 올 들어 내림세를 보이고 있는 환율 전광판 앞을 한 고객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변선구 기자]


한국은행 이성태 총재는 "요즘 원-엔 환율만 보면 가슴이 갑갑하다"며 답답한 표정이다. 이 총재는 "가끔 국제회의에서 마주치는 일본은행 총재에게 따져도 '수요.공급에 따른 시장 논리'라는 판에 박힌 답변만 돌아온다"고 말했다..

한국경제가 엔저로 삼중고(三重苦)를 앓고 있다. 국내 수출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경상수지 흑자가 위협받고 있다. 시중 유동성이 넘쳐나는데 환차익을 노린 외국 자금까지 밀려들어 금융시장도 불안하다. 더 약한 통화로 치닫는 미.일.중의 환율 전쟁에 치여 한국만 새우등 신세가 된 채 원화 가치만 '나홀로 강세'다. 한은과 재정경제부로선 이런 흐름을 통제할 마땅한 정책 수단도 없는 상황이다.

◆서민 생활에까지 파고든 엔저=지하철 곳곳엔 일본계 대부업체인 러시앤캐시와 산와머니의 광고판이 붙어있다. 한국계 대부업체 광고판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 일본계 두 회사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50%가 넘는다. 이들이 한국 시장을 장악하게 한 '일등 공신'은 바로 '엔저(低)'다.

일본계 대부업체는 일본에서 연 9~11%의 금리로 자금을 끌어온다. 국내 대부업체 조달금리(연 20%)의 절반 수준이다. 콜금리가 연 0.5%에 불과한 일본에서 돈을 끌어와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한국(콜금리 연 4.5%, 대부업 최고금리 연 66%)에 투자한다.

한국계 대부업체 관계자는 "원-엔 환율이 계속 떨어지는 만큼 더 빨리, 더 많은 돈을 빌려올수록 일본계 대부업체엔 남는 장사"라고 말했다. 2일 원-엔 환율은 749.11원으로 떨어졌다. 2004년 1월 1112.68원에서 3년 반 만에 33%나 하락한 것이다. 원-달러 환율도 같은 기간 1182.23원에서 921.70원으로 22% 떨어졌다.

엔화 약세-원화 강세는 한.일 경제 판도도 뒤바꾸고 있다. 값이 싸진 일본 상품이 더 몰려들고 거꾸로 상대적으로 임금과 땅값이 싸진 일본에 한국 기업이 진출을 모색하기도 한다.

올해 1~5월 누적 경상수지는 28억2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13억7000만 달러 적자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서울에 주재하는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의 고다카 가즈오(小高一男) 고문은 "지난해부터 한국 시장에 상품을 수출하려는 일본 기업들의 전화가 많이 오고, 거꾸로 일본에 기술연구소 부지를 물색하려는 한국 기업의 상담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커지는 금융시장 불안=엔저는 일본의 낮은 금리를 무기로 위세를 더 떨치고 있다.

산은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2년 사이 국내로 유입된 '엔 캐리 트레이드'(금리가 낮은 일본에서 돈을 빌려 금리 높은 나라에 투자하는 것) 자금은 약 6조8000억원에 달한다. 이렇게 몰려든 자금은 다시 엔저를 부추기게 된다. 당장 외환딜러들부터 죽을 맛이다. 외환은행 조현석 딜러는 요즘 수출업체에서 쏟아내는 달러 매물이 영 달갑지 않다. 그는 "한때는 수출 대국이라는 자부심이 앞섰지만 요즘은 원화 강세로 중소기업들 허리가 휘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깊어가는 정책당국의 고민=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의 요즘 관심사는 시중에 너무 많이 풀린 돈을 어떻게 잘 거둬들일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그는 지난달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최한 CEO 조찬간담회에서 그런 고민을 털어놨다. 그는 "과잉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려면 금리인상이 가장 효과적이지만 원화 강세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이것이 정부 당국의 딜레마"라고 말했다. 안병찬 한은 국제국장은 요즘 조선.중공업 등 잘나가는 업종에서 연일 수주가 늘고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이들 업종이 올 상반기 벌어들인 돈만 360억 달러. 그는 "물밀듯 들어오는 수출 대금에다 국내 증시로 쏟아지는 외국인 투자자금으로 원화 강세가 이어지고 있다"며 "이게 다시 엔저를 부르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어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김창규.손해용 기자<teenteen@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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