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손놓은 정권교체기/이재학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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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요즘 정부종합청사는 한가해 보인다. 장·차관들이 주재하는 간부회의와 국장들이 주재하는 과장회의로 대부분의 오전 업무가 마무리 된다. 그 회의라는 것도 일상적인 업무보고 외에는 대부분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주고 받으며 차나 마시는 정도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거의 모든 장·차관들이 옷을 벗게 되는 탓일까,아니면 새정부의 조직개편구상이 공무원들의 일손을 멈추게 한 것일까.
하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꼭 해야할 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무기력한 분위기가 온통 번져 있다.
게다가 노태우대통령은 매년 연초에 실시해온 각 부처의 신년업무보고도 서면보고로 대체키로 했다. 대통령당선자측과의 정부 인수인계업무에나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라고 청와대측은 설명했다.
그러나 취임식 등을 준비하는 총무처를 제외한 각 부처의 대통령직 인수위에 대한 협조에는 그리 큰 일이 있지도 않다고 한다.
『김영삼 차기대통령측에서 개혁을 하겠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아무것도 드러난게 없고 그렇다고 우리더러 무엇을 검토해 달라고 하지도 않는데 우린들 섣불리 무엇을 기획하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푸념과 하소연이 뒤섞인 모부처 K국장의 실토였다.
요컨대 최근 정부 각 부처가 행정의 공백이라 해도 지나칠게 없을 정도로 일손을 놓고 있는데는 공직자들의 눈치보기가 가장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공직자들의 눈치보기가 꼭 공직자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김 차기대통령측에서 그 원인을 제공하는 측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비단 공직사회뿐만 아니라 정권교체기에는 누구나 새 집권세력의 의중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김 당선자측은 당선순간부터 이미 일정부분 국정운영을 책임져 나간다는 자세를 보여야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같은 자세는 차기집권세력의 국정운영 방향과 그 결정과정에 대한 기대가능성을 보여줄 때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김영삼 차기대통령 이외에 차기국정을 이끌어갈 세력이 누구인지,그들은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노 대통령은 요즘 신세진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송별모임으로 하루일과를 메우고 있다.
아직도 새 정부가 들어서려면 한달하고도 열흘 남짓 지나야 한다.
이렇게 무기력한 임기말 대통령과 비계획적인 차기대통령이 공존하는 기간이 2개월 이상이라는 것은 너무 낭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인수·인계기간이 너무 길다면 제도적으로 기간을 줄이든지,전후임의 자세에 문제가 있다면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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