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불안” 속타는 국민당 의원/휘청거리는 당·대표에 안절부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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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 대표 돌출행동·2천억 백지화로 위기감/아직은 내연… 표면화되면 당와해 가능성도
최근 이해하기 힘든 행보로 곤혹스러운 사람은 정주영국민당대표만이 아니다. 국민당 소속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정 대표야 스스로 자초한 면이 크지만 의원들이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곤혹한 처지가 돼버렸기에 한층 더 착잡한 듯하다.
정 대표가 출국에 실패한 바로 다음날인 14일 최고위원·당직자 연석회의와 긴급의원총회가 잇따라 열린 것은 출국금지를 「야당탄압」으로 규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심상찮은 내부 분위기를 잡아보자는 뜻이 더 담겨있는 것 같았다. 외형적으로 볼때 이날 두차례 회의결과는 『앞으로 더 단합하고 힘내 잘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부불만이 진정되기보다 끓고 있다. 이날 모임에서도 내부불만의 두가지 핵인 「정 대표의 이상한 행적」과 「정치발전기금 2천억원 조성약속의 백지화」에 대한 이의제기는 있었다. 그러나 폭발시키거나 표면화시키지는 않았다. 당장 대안도 없이 공멸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비밀출국시도로 대표되는 정 대표의 일련의 이상한 행적은 여러 의원들을 심란케한듯 하다. 김범명의원의 경우는 『지역구 사람들이 「정 대표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슬그머니 피한다』고 「곤란한 처지」를 호소했다. 박제상의원은 『어젯밤 지역구 사람들의 전화에 시달렸다』고 했고 이학원의원은 한발 더 나아가 『공당의 대표라는 것을 잊지말고 비서실장이나 대변인을 꼭 동행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2선후퇴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내가 일선에서 당을 이끌어가는게 최선이라 생각한다』는 정 대표 앞에서 어떤 의원도 「2선후퇴」를 요구하지 않았다.
보다 근원적인 불만은 아무래도 돈이다. 돈은 국민당의 구심점이며 버팀목이다. 장기적으로 볼때 국민당의 생존가능성을 담보해주는 유일한 열쇠는 2천억원 기금조성이라 할 수 있다. 기금조성 백지화문제는 새한국당에서 입당한 유수호최고위원에 의해 제기됐다. 유 의원은 『나는 돈 몇십억원에 팔려온 것이 아니다. 2천억원에 팔려왔다면 팔려왔다고 할 수 있다』며 『기금은 대선의 승패와 관계없이 내놓기로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이에 대해 『김영삼정권하에서 주식을 팔 수 없어 조성이 불가능하다』고 한뒤 『당초 대선에서 당선되면 내놓겠다고 했던 것』이라고 「승패여부에 관계없이」라는 부분을 반박했다. 유 의원은 다시 대꾸했지만 강하게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문제만 제기했지 더이상의 주장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유 의원은 의총이 끝난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동길의원의 얘기가 맞다. 기금조성은 대선에서의 당락여부와 관계없이 조성하기로 했던 것이니만큼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합당과정에서 작성했던 「합의문」까지 내보이고 설명했다. 그리고는 『소환장까지 발부된 상황에서 정 대표에게 차마 내놓으라는 얘기는 못하겠더라』며 공식적으로 약속이행을 촉구하지 못한 이유를 의총을 지배한 「전반적 위기감」 탓으로 돌렸다.
정 대표의 백지화선언 현장에 배석했으며,이를 「김영삼차기대통령측의 압력」으로 해석했던 한영수의원조차 의총이 끝난뒤 『개인적으로 정 대표의 2천억원 백지화선언에 실망한다』고 입장변화를 보였다.
일단 돈문제는 입당파의원들에 의해 아주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셈이다.
국민당 이름으로 당선된 창당파라고 기금에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현재로서는 입당파의원들이 기술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을뿐이며,창당파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임은 물론이다. 당선직후 입당해 「창당파」로 분류되는 김정남총무는 정 대표의 백지화선언 다음날 『기금조성약속은 국민과 당에 대한 약속이기에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또 지켜질 것이라 믿는다』는 말을 남기고 외유를 떠났다. 익명을 요구한 다른 창당파의원도 『지금 국민당의 최대위기는 국민에 대한 신뢰를 회복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며,기금조성은 신뢰회복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정 대표는 무조건 내놓아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 역시 『아직 분위기가 성숙지 못해 공식석상에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은 문제를 표면화할 시점이 아니라는 생각들이 지배적이어서 불만이 폭발하지는 않고 있다. 때가 「이르다」는 것은 『선거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얘기라기보다 『정 대표 자신이 사법처리의 위기에 처해있다』는 얘기인 듯하다. 따라서 정 대표가 15일 검찰에 출두하고 클린턴 취임식에라도 참석할 형편이 되면 국민당의원들의 불만은 곧 표면화될듯하다. 표면화될 경우 정 대표에 대한 기금출연요구는 거세질 것이며,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탈당 등 본격적인 동요가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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