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 새 연재소설『해는 뜨고…』일본취재 단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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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본지에 4일부터 장편『해는 뜨고 해는 지고』를 연재할 작가 한수산씨가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될 일본 현지에서 마무리 취재를 마치고 그 단상을 보내 왔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의 처절하면서도 다양한 삶을 사실에 입각, 한씨 특유의 소설적 미학으로 이끌어 나갈『해는 뜨고 해는 지고』의 전체적 분위기를 예감케 하는 하나의 서장이다. 【편집자 주】
나가사키를 마지막으로…일본을 떠나면서 취재여행은 끝이 났다. 도쿄로 돌아가기 위해 새벽 차를 타러 숙소를 나서는데 밖에는 비가 내린다. 취재여행이란 늘 그렇다. 만나 보아야 할 사람, 찾아가야 할 자리는 가득했어도 떠나는 나를 배웅해 줄 사람은 없다. 있다면 증언 속의 사람들, 그리고 기록 속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는 없고, 나는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함께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열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처연하게 쏟아지는 빗발을 바라본다.
아사히 신문 나가사키 지국 기자가 취재를 왔었다. 그에게 말했다.『나도 모르겠다. 왜 나는 여기에 매달리는지. 그러나 현장취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누우면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너의 나라 땅에 끌려와 죽 어간 조선인의 신음소리가. 그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온 것이 아니라 저 신음소리가 나를 부른 것이라고.』
1940년대 일본 땅에 끌이여 왔던 조선인의 작은 파편 하나라도 좋으니 작품으로 복원시키겠다는 결심을 한 후, 내 작업은 도쿄의 고 서점을 뒤지는 것에서부터 최남단 나가사키의 현장을 답사하는 데까지 이어져 왔다. 작품의 주인공이 될 그들의 체험이 나의 것으로 환치되기를 감히 바랐을 리 없다. 다만 그들이 맞았을 바람 속에 나도 함께 서 보고 싶었다.
지하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우라카미 형무소」자리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또 무슨「우울한 행운」이었던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후 이 형무소의 폐허를 덮고 일본은「평화공원」을 만들었었다. 그러나 넘치는 주차 난을 이기지 못해 지하 주차장을 만들기로 하고 공원을 파헤치던 중 느닷없이 형무소 건물 터가 마치 선사유적처럼 벽돌자리 그대로 드러났던 것이다. 원폭 당시 이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13명의 조선인이 폭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시마는 참혹했다.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섬. 이제는 무인도가 된 그 섬의 지하 7백m 아래에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살아 돌아갈 날이 있으리라는 그 무엇도 믿지 못하면서 신음하며 죽어 갔다.
끔찍한 일들도 만났다. 세고우인 이라는 절 지하에는 아직도 식민지시대에 끌려와 이국에서 죽 어간 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조선인의 유골단지 1백50여 개가 먼지 속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지하실 위층은 이 절이 운영하는 유치원의 강당 같은 곳이 아닌가. 한 서린 조선인의 뼈 위에서 뛰놀고 있는 저 유치원 아이들의 병아리 같은 재잘거림은 무엇이란 말인가.
현립 도서관을 뒤져 귀하게 찾아진 자료를 읽다 보면 생각지도 않게 만나는 조선인도 있다. 이름을 보면 안다. 가네자와 삼봉. 아, 그러면 이 사람은 김삼봉이다. 김삼봉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그 출신이 어떠했을까는 이해가 된다. 내가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는 탄식도 있었다. 재일 한국인을 만나면 무엇하겠는가. 그들도 이제 일흔을 바라보면 그래도 젊은 사람이다.
그때 끌려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땅에 눌러 산 사람들, 그들은 거의가「한글 문맹자」들이다.『서당은 몇 달 다녔는데…』그것이 그들의 교육경력이다. 그리고 모두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과거를「잃어버렸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이제 대 일본제국에 대한 미움도 보이지 않는다.
돌아가면 다시는 미쓰비시회사 제품을 쓰지 않으리라. 분노 때문에 차라리 덧없고 서글픈 약속을 스스로에게 한다.
그때 끌려온 조선인이 노예처럼 일했던 군수산업 미쓰비시의 공장 터는 도처에 남아 있다. 어찌 남아 있기만 한가. 이제는 그 사옥이나 공장의 외형만으로도 세계의 기업 미쓰비시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나 나가사키에 만도 미쓰비시 중공업계열의 회사 가운데 강제징용으로 끌려왔던 조선인은 조선소에만 6천3백50명, 병기제작소에도 2천1백33명이었다. 다리가 아프게 옛날의 숙소자리를 더듬어 찾아가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마치 포로수용소를 연상시키는 숙소에서 스물 네 시간의 감시를 당하며 노예처럼 일했고, 다쳤고, 죽어 갔지 않은가. 그런데도「미쓰비시」는 단 한푼의 배상은커녕 살아남은 그들에게 급료조차 지급하지 않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토록 외진 자리를 찾아 지어졌던 통한의 숙소 자리에는 이제경제대국 일본의 쾌적한 별장들이 들어서고 아파트 단지로 오르는 아스팔트길을 흰 승용차들이 골프채를 싣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빗발은 여전히 선로를 때리는데 출발의 아나운서 멘트가 울린다. 나라를 잃어버렸던 자들의 통한이여, 이제 나도 떠난다. 신이여 저에게 주소서. 장 절한 하나의 이야기를 써낼 수 있는 힘을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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