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교국에 여행허가는 뭔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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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법이나 제도 또는 규정은 일정한 사회적 현실의 산물이다. 그것들은 일단 결정되면 고정된 규범으로서 사회적인 안정과 질서를 제공하지만 사회적 현실은 계속 변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규범이라도 그 생명력과 실효성을 유지해 나가려면 사회변화에 신축성있게 적응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못해 문제를 야기하는게 많은데 대표적인 예가 「특정국가 여행허가제」같은 것이다. 이것은 정부가 지정한 국가들에 대해서는 정부의 허가없이는 내국인의 여행을 금지시킨 제도다. 정부는 최근 수교한 베트남을 비롯해 아직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캄보디아·라오스·쿠바·그루지야 등 5개국을 「미수교 특정국가」,러시아 등 독립국가연합의 11개국을 「수교 특정국가」로 분류하여 상대국쪽의 초청장과 한국정부 관련부처의 추천장을 첨부하여 여행허가를 신청토록 하고 있다.
베트남은 수교가 이뤄졌으므로 내년 1월중 재분류될 방침이지만 중국의 경우는 지난 8월 국교가 수립된 후에도 계속 「미수교특정국가」와 똑같은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문제는 이같은 규정이 페레스트로이카 이전 공산권과 냉전관계에 있던 시기에 제정된 내용을 지금까지 적용하고 있다는데 있다. 정부가 「특정국가」로 지정한 상대국가들의 대부분은 이제 공산국가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국교를 맺었거나 경제교류가 이뤄지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절차가 까다로워 국민의 불편이 많을 뿐만 아니라 외국과 경쟁하며 상담해야 하는 기업인들의 경우 아주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가령 중국이나 베트남에 가서 상담을 벌일 필요가 있는 기업인은 먼저 상대방 기업에 부탁하여 초청장을 얻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시기를 놓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상담상대의 신세부터 져야 하므로 상담이 처음부터 불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경쟁국 기업인들에 비해 크게 불리한 조건이다.
이처럼 다수 국민에게 불편을 주고 기업인들의 국제경쟁을 불리하게 하는 규정이 현상태로 계속 존속돼서는 안된다. 정부안에서도 개정을 주장하는 견해가 많으나 공안담당부서의 반대로 개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국이 아직 완전히 자본주의화하지 않았고 북한과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 국민이 마구 드나드는 것을 규제하려는 의도인듯 하다. 그러나 지금 급증해가고 있는 여행자들을 그런 방식으로 규제하거나 감독내지 보호한다는 것이 실제로 과연 가능한 일인가.
따라서 별로 실익도 없고 국민불편만 가중시키면서 오히려 국가이익 증진에도 도움이 안되는 비현실적인 별도 여행허가 규정은 변화된 현실과 이익에 맞춰 시급히 폐지하거나 대폭 규제를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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