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보 달리고 판매는 외상/중기 만성 자금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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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잇단 기업인 자살로 본 실상/현금거래는 5.9% 불과/관련업계 도산 연쇄 파급
이달초 한국기체공업 구천수사장이 목숨을 끊은데 이어 23일 중소부품업체인 조광정밀 정윤현사장이 또다시 자살,중소기업인들의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이번 정씨의 경우는 기술개발을 통해 어느 정도의 자금지원도 받았다가 무리한 시설투자로 쓰러진 구씨의 경우와는 달리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어 은행돈 한번 쓰지 못하고 만성적인 자금난에 시달려야 하는 오늘날 대부분의 중소기업계 실상에 대한 단면이었다.
또 『시중엔 필요한 자금이 고갈돼 갑니다』라는 정씨의 유서문구처럼 정부가 그동안 지원한 수천억원의 중소기업 지원자금과 은행에 대한 중소기업 지원확대조치가 얼마나 형식에 그치고 있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올들어 극심해진 내수시장의 침체상태에서 판매부진이 심화되고 이에 따라 판매대금이 제대로 회수되지 않는 결과가 빚어지며 원청·하청업체 할것없이 연쇄적인 자금난에 시달리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중소기협중앙회가 23일 발표한 「중소기업 영업실태조사」에 따르면 판매대금을 전량 현금으로 받는 기업은 5.9%에 불과하고 나머지 94.1%가 어음 등의 외상거래를 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86%의 업체가 50% 이상을 외상판매하고,전량을 외상판매하고 있는 업체도 20%에 달하는 실정이다. 시설투자는 커녕 기본적인 운영자금마저도 부족해진 상황인 것이다.
시중 실세금리가 내리고 정부자금이 풀렸다고는 하나 지난 3·4분기 중소기업 경영실태조사에서 64%의 업체가 전분기보다 자금사정이 나빠졌다고 응답한 이유도 이같은 상황때문이다.
더구나 대부분 업체들의 담보제공 능력이 이미 바닥이 나버려 판매대금 회수나 개발투자에 조그마한 하자가 발생해도 부동산만을 담보로 요구하는 금융기관으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지고 만다.
물론 내수침체에 따른 판매부진까지 정부책임으로 돌린다는 것은 무리가 있고,국내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정부의 산업구조조정 정책아래서 경쟁력이 없는 기업의 정리도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원자재 공급업체·원청업체·하청업체·판매업체 등이 서로 얽혀 있는 산업환경 아래서 한 업체의 경쟁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관련업체가 도산하면 연쇄 도산할 수 밖에 없는 산업환경에 대한 개선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몫이다.
세계적인 스포츠용품메이커인 (주)낫소가 국내에서 예정됐던 판매대금이 회수되지 않아 소액의 어음을 막지 못하고 부도를 낸 것이 바로 그 예다.
또 잔고가 없다는 이유 하나로 부도판정을 내버리고,부동산담보 없인 한푼의 금융지원이 불가능하며,일반대출자금은 물론 정책자금까지 「꺾기」를 하는 은행의 실태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금융환경의 개선도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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