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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대통령”… 중학때부터 꿈 키워(김영삼당선자 스토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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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반독재투쟁·결단의 38년 정치역정/검은 돈과는 거리… 깨끗한 정치표방/유신정권땐 의원직 제명1호 기록/83년 단식으로 민주세력결집 성사
「신한국창조」를 내건 김영삼당선자는 선거막바지 민주당의 변절론 시비와 국민당의 부산기관장모임 폭로의 역풍을 헤치고 중학시절이래의 꿈을 성취했다.
지난 54년 최연소 국회의원(25세)으로 당선된지 38년,경남중 재학시절 하숙집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을 붓글씨로 써붙인지 50년만에 그는 마침내 필생의 소망을 달성한 것이다.
그는 한국정당사에서는 최초로 경선에 의해 여당후보로 선출됐으면서도 노태우대통령의 탈당으로 원내 제1당 후보로 선거에 임해야 했다. 전 여권이 총동원돼 무대·조명·각본을 짜고 풍족한 자금이 뒷받침된 상황에서 충실한 배우 노릇만 하면 됐던 13대 노태우 민정당후보와 달리 그는 자신의 얼굴만으로 선거를 치러냈다.
그렇기 때문에 김 당선자의 『차기정권은 6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정권』이라는 주장은 나름의 고뇌의 표현이다.
31년간의 군사독재 내지는 군 출신 대통령 시대는 물러가고 문민정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당내 후보경선때 『김영삼을 지지하지만 경선은 공정하게 관리하겠다고 해달라』고 했지만 『노 대통령이 들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또 노 대통령의 탈당문제에 대해서는 『명예총재직만 그만두고 당원으로라도 남아달라고 했는데 자꾸 탈당하겠다고 하더라』며 불만을 털어놨다. 그만큼 억하심정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3당합당이 없었다면 그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여소야대 정국이 계속됐으면 헌정중단 사태가 왔을지는 알 수 없지만 원내 제1당의 후보는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3당통합 대결단
그의 38년 정치생애는 흔히 투쟁과 결단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대담한 결단이 3당통합이었다.
김 당선자의 야당시절 특보·비서실장과 대변인을 역임한 박권흠경북일보사장(전의원)은 그의 일곱가지 대표적인 결단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자유당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탈당해 야당정치인으로 변신했으며 5·16 이후 군부세력이 공화당 참여를 종용할때 그 유혹을 뿌리쳤다. 69년말 서열위주의 사랑방 정치시절 「40대 기수론」을 제창해 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 출마를 선언했고,72년 10월유신 발표가 나자 미 국무부의 망명권유를 뿌리치고 서둘러 귀국해 가택연금됐다. 79년 뉴욕타임스지 회견내용 때문에 국회의원 제명위기에 몰렸을때 김재규중앙정보부장의 회유에 거부했고,신군부 출현 이후 83년 5월18일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23일간의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최후의 결단이 3당통합이다.
합당 당시 김 당선자는 『구국의 결단』이라고 했지만 야권에서는 『국민이 만들어준 여소야대 구도를 정치야욕 때문에 깨뜨린 변절자』라고 비난했다. 이 문제는 이번 선거에서도 그의 발목을 끝까지 붙잡았다.
스스로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았다』고 자랑하지만 세상은 좀처럼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3당합당 결정이 「구국의 결단」인지 단순한 「야합」인지는 그의 5년간 재임기간이 끝나면 역사에 의해 평가될 것이다. 어쨌든 이제 국민은 그를 선택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정치적 결단이나 선택이 우리 정치사의 큰 전환점이 됐다는 사실이다.
3대총선에서 이기붕자유당총무부장의 추천으로 자유당 후보로 나서 당선된 그는 6개월만에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소장의원들과 함께 탈당하는데 이것이 정통야당 민주당 창당에 결정적인 촉매제가 된다.
69년 40대 기수론은 박정희정권의 3선개헌안 통과로 좌절과 실의에 빠져있던 신민당에 세대교체의 바람을 불러일으켜 성공시켰다. 당시 유진산당수 등 신민당 수뇌부는 구상유취 하다고 혹평했으나 결국 세대교체 바람에 굴복해야했다. 그는 74,79년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당권을 장악함으로써 유신정권의 종말을 재촉했다.
83년 단식투쟁은 신군부의 서슬에 눌러 지리멸렬하던 민주화 세력들을 결집시켜 85년 2·12총선(12대) 신민당 돌풍의 원동력이 됐고,그것은 87년의 직선제개헌 쟁취로 열매를 맺었다. 90년 1월 3당통합은 여소야대 정국을 거여주도로 바꿔놓았다.
그는 늘 여론의 중심에 서있기를 원했고 변화를 만들어 상황을 주도해나갔다. 3당합당에 대해서도 정치권에서는 『87년 대선실패와 88년 총선에서 제3당의 총재로 전락,정치의 중심무대에서 잊혀져가는 것을 견디지 못한 때문이엇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가 경남중 재학시절(현재 학제로는 고교시절)부터 「미래의 대통령」꿈을 꾸었다고 해서 『대통령병 환자』라는 일부의 비웃음도 샀지만 그것이 김 당선자를 권력과 돈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붙들어준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장자 대통령이 될 사람이 흠잡힐 일을 할 수 없고 권력의 위협에 굴복할 수는 더욱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동료의원들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선출직 야당 원내총무를 다섯번이나 연임한 것은 그가 의원들과의 관계에서 베푸는 위치에 있었거나 그들과 이해관계로 충돌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치권에선 김대중씨가 지장이라면 김 당선자는 덕장이란 평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는 상임위를 선탁할 때도 검은 돈이 많이 생기거나 지역구 선거에 유리한 인기상위를 피하고 국방위 등 비인기 상위에 자원했으며,함께 술을 마시면 술값은 대체로 그의 몫이었다.
그가 검은 돈을 탐내지 않고 비교적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김홍조씨(83)의 뒷받침이 큰 힘이 됐다. 거제 갑부였던 김씨는 선거때마다 집을 팔아 선거비용에 충당했던 아들에게 그때마다 집을 다시 사주었으며 명절때마다 자신의 어장에서 잡힌 멸치를 선물용으로 올려보냈다. 당시 정치인치고 「김영삼 멸치」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의 돈에 대한 담백한 성격과 정치철학은 조병옥·신익희 등 50년대 야당원로들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50년대의 조 박사와 60,70년대의 김영삼을 두고 당시 야당에서는 『그들의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김 당선자는 민주당 구파의 영수인 조 박사의 직계로 그가 반대세력인 신파정치인에게조차 서슴없이 돈을 내주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는 『정치자금을 받아 쓴 적이 없느냐』는 질문에 『많이 만들어 썼다. 그렇지만 나는 돈이 잠시 머무르는 정거장에 불과했다』고 답변했다. 친지들과 기업인들이 돈을 놓고 가면 그 냄새를 맡고 찾아온 야당 정치인들에게 아낌 없이 돈을 나눠줬으며 결코 축재하는 일은 없었다고 측근들은 전하고 있다.
○원내총무만 5번
정치인에게 돈을 정치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이며 필요한 돈은 구해지게 마련이고 없으면 모자라는대로 꾸려가면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한푼도 자신을 위해 저축하지 않았으며 땅 한평 늘린적 없다는 것이 그의 자랑이다. 정주영국민당후보가 선거중반 이후 정치자금 폭로를 협박했지만 그 이전까지는 『김영삼씨는 돈에 관한한 깨끗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돈 씀씀이가 헤픈 대신 사치할줄 모른다. 24년 된 그의 상도동 집은 수리 한번 하지않아 벽을 만지면 모래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부인 손명순여사에게 전용 차가 나온 것은 후보로 결정된 뒤의 일이다.
『촌로가 때묻은 쪽박에 따라준 막걸리를 마실줄 모르는 사람은 정치를 그만둬야 한다』는 조 박사의 가르침 탓이다.
그의 대인관계는 원만한 편이지만 친구나 동지에게도 말이나 표정으로 애정을 표시할줄 모른다. 후보가 된뒤 측근들이 『선거자금을 갖고 오는 사람들에게 좀 따뜻이 대해주라』고 권유했는데 그는 『알았다』고 해놓고는 예전과 같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했다. 측근들이 물었더니 『잘 안된다』고 대답했다. 평생을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정치세계에서 살다 보니 잔정을 주고받는 방식을 익히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또 시간과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야당총재 시절 회의시간에 몇번 지각한 정치인들은 그의 눈 밖에 났고 재기하기 어렵게 됐다는 얘기가 있다. 지금도 오전 5시20분 기상,마산의 아버지에게 안부전화,1시간동안 조깅하는 그의 습관은 어김없이 지켜지고 있으며 아마도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지속될 것이다.
차가 밀리거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늦어지면 반드시 전화로 알려주고 양해를 구하며 따라서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김 당선자는 35년간의 야당생활을 투쟁으로 일관해왔다.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으로 보일만큼 위태로운 반독재 투쟁을 계속했다.
6대국회 때인 지난 64년 제1야당 민정당의 대변인을 맡자 박정희대통령의 연두교서에 대해 『이제 우리는 5·16혁명 이념을 재평가해야 할 때가 왔다』고 당시로서는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발언을 했으며,69년 6월 3선개헌 반대운동을 할 당시 괴한 3명으로부터 초산테러를 당했다. 다음날 그는 국회 본회의에서 『신민당의 개헌반대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보복』이라고 규탄하고 박 정권과의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그해 9월 국회 별관에서 3선개헌 안이 변칙통과 되자 『이제 이 땅에는 히틀러와 같은 독재만이 남게됐다』고 선언했다.
유신정권 말기 탄압이 극심하던 시절인 79년 야당총재로 복귀하자마자 『박 대통령은 물러날 준비를 하라. 불행한 대통령이 되지말기를 바란다』고 경고했다. 이 때문에 그는 야당총재직을 가처분 당했으며 국회의원직 제명 1호를 기록하는 수난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잠시 죽어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다』『쥐를 못잡는 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니다』는 등의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용수철처럼 누를수록 높이 튀어오르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민자당에서도 그는 2인자로서 1인자에 의해 권력을 승계받는 「시혜」방식 대신 내각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노 대통령과 끊임없이 싸워 「쟁취」하는 방식을 택했다.
평생동안 경쟁과 협력관계를 되풀이 해왔던 민주당의 김대중후보와 비교할때 투쟁은 김 당선자의 몫이고 김대중후보는 수난·탄압을 많이 받은 편이다.
그런데도 김 당선자가 구속된 것은 63년 1월 군정연장 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서대문구치소에 18일간 수감된 것 한번 뿐이다. 김대중씨에게는 과격의 굴레가 씌워져 있으나 그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의회민주주의자라는 평을 받았다.
아마 그의 투쟁방식은 과격했으나 정치성향은 온건보수쪽이었고,어머니 박부연씨가 60년 간첩에 의해 피살됐기 때문에 독재정권도 그의 사상을 문제삼지 못했는지 모른다. 또 그가 여당 정치인에게조차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 인간적인 신뢰감을 여권인사들에게 심어주었던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김 당선자는 1927년 12월20일(호적상)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어장주인 김홍조씨와 박부연씨 사이의 1남5녀중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박씨는 인정 많고 도량 넓은 여장부 스타일로 이웃의 어려움을 그냥 넘기지 못했으며 이런 어머니의 음덕으로 김 당선자가 첫번째 국회의원 출마에서 당선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출마할 당시 아버지는 극력 반대했으나 어머니 박씨는 아들을 격려하며 뒷돈을 댔다. 김 후보가 유세장마다 어머니 얘기를 꺼내며 『여기 계신 여성 여러분이 저의 어머니가 되어달라』고 할때면 분위기가 숙연해지곤 했다. 김 당선자의 모성지향적 여성관도 어머니 박씨의 영항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 당선자는 42년 보통학교를 졸업한후 경남 수재들이 모이는 동래중학에 응시,낙방한뒤 다음해 통영중학에 입학했다가 해방직후인 45년 11월 경남중에 전학했다.
그는 어린시절 개구쟁이였으며 지는 것을 싫어하고 고집센 부잣집 외동아들 기질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중학시절에는 수영·씨름을 잘하는 만능스포츠맨이었으며 경남중으로 옮겨서는 축구부에 들어가 레프트 하프를 맡았다. 동창들은 그의 학업성적이 중상정도였으며 문학·역사를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대 철학과 진학
그가 서울대 철학과로 진학한 것은 경남중을 명문으로 육성한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의 안용백교장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공인 철학보다 정치학과목을 많이 수강하고 교내 법문학부 강당에서 열린 연설회에 참석하는 등 어릴때부터의 꿈을 실현키 위해 준비작업에 착수한다.
김 당선자의 가족·친척들은 대부분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부친 김홍조옹은 69년 세번째 결혼한 이수남씨(67)와 마산에서 살고있다.
직계 2남3녀중 차남 현철씨(33)가 아버지를 돕는 것을 제외하고는 장녀 혜영(40) 장남 은철(36) 막내 혜숙(31)씨 모두 결혼해 미국에 살고있다. 김 당선자는 이것이 자신의 정치적 역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얘기한다.
친인척으로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인물은 김봉조의원과 홍인길총무보좌역,김 당선자 부인 손명순여사의 사촌동생인 손주환 전공보처장관 등이다. 그러나 이들도 촌수가 멀거나 정계입문 동기가 김 당선자와는 무관하다.
오랜 야당생활 끝에 어려움을 실감한 김 당선자가 친인척의 정치참여를 극구 만류했기 때문이다. 김 당선자가 친인척 비리에 진저리난 우리 국민들의 정서를 감안해 친인척을 어떻게 통제할지는 두고볼 대목이다.
부인 손씨는 마산에서 경향고무를 경영한 손상호씨(작고)의 장녀로 이화여대 약학과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인이다.<김두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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