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한인 생활체육 통해 유대|미국동부대한체육회-장정수부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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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70년대 중반 유도국가대표를 지냈던 체육인으로 출발, 지금은 미국 굴지의 보험회사 에이전트라는 전문 금융인으로 변신에 성공했으면서도 생활체육을 통한 미국교포사회의 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유도인이 있다.
미 동부 대한체육회 부회장이자 미 동부 유도협회장을 맡고 있는 장정수(40·유도6단)씨가 바로 그 장본인.
미국 5대 보험사 중 하나인 에퀴터블 보험회사가 있는 곳은 세계금융시장의 한복판인 뉴욕 맨해턴 6번가로, 록펠러센터도 나란치 있는데 장씨는 이 빌딩34층에 개인 사무실을 갖고 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대구출신의 장씨는 유도의 명문인 영신중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도에 입문, 영신중 3년 때인 68년에는 중등부 5관왕에 오르면서 유도계에 이름을 날리게 됐다.
유도계에서「무서운 신인」으로 불리던 장씨는 서울의 동북고를 거쳐 당시 유도 특기자로는 단1명만이 스카우트되어 한양대에 진학한데다 곧바로 태극마크를 달아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대학3년 때인 77년 장씨는 대한체육회의 추천으로 볼리비아유도 국가대표팀을 맡게된다.
유도 신생국인 볼리비아는 대표팀 선수들이 장씨의 탁월한 지도력에 힘입어 1년만에 각종 중남미 국제대회에서 무려 18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장씨는 당시 볼리비아 빈셀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듬해 장씨는 베네수엘라 대표팀 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역시 최고의 대우를 받았으나 미국으로의 전출을 결심, 79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당시 뉴욕을 중심으로 한 미국동부에 사는 한인 교포는 5만여명으로 현재의 30만명에 비하면 6분의 1수준.
이미 국내의 체육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장씨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78년에 설립된 뉴욕한인 체육회의 유도담당위원으로 곧바로 추대, 감사·사무총장을 거쳐 지난84년 제4대체육회부회장에 오른 이래 지금까지 세차례 연임을 계속해오고 있다.
뉴욕한인체육회는 82년 미 동부 대한체육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장씨는 유도협회를 조직, 경기위원장·총무를 거쳐 현재 제5대 유도협회장직도 맡고 있다.
교포들은 예나 지금이나 외롭고 힘든 이국생활에서 그나마 고향소식을 접하고 끈끈한 핏줄의정을 나누는 기회로는 주말에 나가는 교회와 교민체육대회뿐이다. 따라서 한인회의 활동은 자연 체육활동이 주축이 되며 장씨는 뉴욕 한인사회의 「감초」처럼 인정받게 되었던 까닭에 각종 감투(?)를 쓰게 되었던 것.
학업을 중단하고 부인 김난숙(39)씨와 함께 잡화상을 꾸려야만 했던 7년간의 힘든 생활 속에서도 교포사회의 온갖 일을 도맡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장씨의 마음속에「한번 체육인이면 영원한 체육인」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민 1세들의 고생은 단지 자신들만의 고생으로 끝날 뿐입니다. 그러나 1.5세, 2세들의 정신적·육체적·사회적 고생은 개인만의 문제로 치부될 수 없다는데 심각성이 큽니다.
한국교포들의 집단 상가지역인 플러싱 번영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뉴욕시 아시안 경찰 자문위원직을 맡았을 때 장씨는 설명하기도 힘들만큼 극한 상황에까지 몰린 탈선2세들을 만났다.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탈선2세들을 만났을 때의 착잡함이 장씨 스스로에게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경험에서 우러난 스포츠철학-「몸과 몸을 부닥치는 스포츠를 통해서만 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자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신념으로 자리잡게 됐다.
82년 뉴욕에서 개최한 전미주한인 체육대회 경기준비위원장을 자원했던 것을 시작으로 85년 시카고대회, 89년 필라델피아대회, 91년 LA대회 등 계속해서 동부팀 총감독을 맡은 것도 그렇고89년부터는 매년 체육대회와 가요제, 댄스파티를 망라하는 청소년대축제를 개최해오고 있는 것도 그러한 신념의 발로에서다.
그밖에도 장씨는 매주 토요일오후 컬럼비아 대학체육관을 빌려 80여명의 1.5세, 2세들을 상대로 무료 유도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장씨가 하고 있는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발간예정이었으나 여건이 허락치 않아 빛을 보지 못한 「뉴욕한인 체육 10년사」를 보장, 오는 93년 「뉴욕한인 체육15년사」편찬의 일도 장씨의 꿈이다.
그래서 장씨의 서재에는 미독부 체육회산하 18개 경기단체가 주관하는 수많은 대회 및 행사에 관한 자료는 물론이고 10년이 넘도록 개최되고 있는 교회협의회주최의 탁구대회 기록, 교회협의회 산하 30개팀이 넘는 야구팀서수들의 신상명세까지 각종 자료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 차있다.
『우리가 죽으면…』장씨는 말을 잇는다.
『1978년8월30일 영사관 문화원에 있는 코리아센터에서 63명의 체육인이 함께 모여 뉴욕하인 체육회 창립총회를 가진 날부터 시작,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펼쳐지는 한인최고행사로 청과상조합 주최인 지난해 추석 맞이 민속 대잔치에 8만명이 참석했다는「사실까지가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면 이미 미국인이 되어버린4, 5세가 어떻게 자신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뉴욕=김인곤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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