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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세탁소 상대 530억 소송 낸 미국 판사 "주민 위해 소송" 법정서 궤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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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 워싱턴에서 한인 교포 세탁소를 상대로 잃어버린 바지 값으로 5400만 달러(약 530억원)를 배상하라는 재판이 12일 시작됐다. 상식을 한참 뛰어넘는 배상 요구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미국 행정법원의 현직 판사 로이 피어슨이 제기한 소송이다.

이날 워싱턴 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피어슨은 엉뚱한 주장을 했다. 그는 "바지 분실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취하하겠다. 대신 세탁소 주인 정진남씨가 가게 문에 붙여놓은 '고객만족 보장(satisfaction guarantee)'이란 표지를 문제 삼아 같은 금액의 소송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정씨의 영업 태도는 고객만족과는 거리가 먼 데도 이런 문구를 걸어놓고 소비자를 현혹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잘못된 상도덕을 바로잡아 이 지역 전체 주민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장은 "이 소송은 주민 전체가 아닌 당신 한 명에 국한된 것"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피어슨은 이 세탁소에서 피해를 봤다는 증인들을 출석시키며 공세를 펼쳤다. 40대 여의사는 125달러짜리 드레스가 세탁 과정에서 손상됐으나 주인이 배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여성은 100달러짜리 스웨터를 정씨에게 맡긴 뒤 찾으러 갔지만 정씨가 "그런 세탁물은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해 다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은 "어떻게 해주면 만족하겠느냐"는 정씨 변호인 크리스 매닝의 질문에 "옷을 고쳐주든지 옷값을 배상하면 된다"고 답했다. 피어슨이 요구한 천문학적 금액과는 거리가 먼 반응이었다. 일곱 시간이나 계속된 공판이 끝나자 피어슨은 눈물을 흘리며 "이 소송은 워싱턴 주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재판을 지켜본 50여 명의 미국 주요 언론사 기자들과 한인들은 피어슨의 주장에 혀를 차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송 남용 반대 시민모임의 다렌 매키니 대표는 "이 소송은 소비자보호법의 극단적 남용이며, 미국 시민의 세금만 축내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30년 넘게 워싱턴에서 세탁업을 해온 교포 오명호씨는 "미국에서 세탁소가 손님의 옷을 손상.분실하면 소규모 소송으로 해결하는데, 배상은 상식 수준을 넘지 않는다"고 말했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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