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제2가나안 농군학교 김범일교장(일요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인간다운 삶」 구현 새 기치로”/설립목적 “가난 퇴치” 거의 이뤄/요즘엔 직장인·학생이 더 관심
가나안농군학교는 대를 이어 정신으로 살아 남았다. 농업을 뒤로 제끼는 산업화의 도정이라고 해서 근로·봉사·희생이란 가나안의 정신까지 내던져질순 없는 것인가. 요즘도 가나안농군학교에 들어와 교육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이고 서서 아우성이다.
가나안 제2농군학교 교장 김범일씨. 고 김용기장로의 5남매중 둘째아들이다. 『애비의 뜻이 적어도 3대는 이어지길』 바랐던 김 장로의 유지를 받들어 5남매가 다 농군학교일에 매달려 있는 중에 그의 형님인 김종일목사(63)는 이사장,그는 교장으로 가나안 운영의 실질적 주인이 돼있다. 올해 58세인 김범일교장은 많이 벗겨진 머리를 빼면 외양이 나이답지않게 퍽 젊고 탄탄해보인다.
『20여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마다 뛴 덕분이지요.』
­제2농군학교라면 두번째 세운 학교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일제하인 30년대부터 양주 봉안에서 이상촌운동을 하시던 선친께서 54년 경기도 광주 황산마을에 버려져있던 황무지 1만평위에 가나안 농장을 건설하고 그 8년뒤인 62년 2월 42명의 제1기 교육생을 수료시키면서 처음으로 가나안농군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강원도 원주군 신림면에 자리잡은 지금의 이 농장은 70년대초 평당 30원씩 하던 산지를 사 일군 것으로 이런저런 교육시설을 갖춰 73년 3월 다시 농군학교를 열고 먼저 있던 광주 가나안농군학교를 제1학교,이곳을 제2학교라고 명명하게 된 겁니다.』
­학교며 농장에 딸린 땅이 꽤 넓어보이는군요.
『한 15만평됩니다. 이걸 셋으로 쪼개 5만평은 기도원,5만평은 농장,5만평은 학교교육장으로 쓰고 있지요. 기도원(성도원)은 「바로삶」을 향한 정신,농장은 「잘삶」을 목표로 한 물질의 계발을 표상하는 것이고 이 둘을 가운데서 잇고 그 수준을 고양시키는 존재가 바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30년이란 연륜이 둘리는 동안 농군학교를 거쳐간 사람도 엄청난 숫자에 이를텐데요.
『물론입니다. 학생과정·단기과정·특별과정 등 과정이 예닐곱되는데 제1·2교를 합해 지금까지 약 42만명이 다녀갔습니다. 매주 월요일 입교했다가 금요일에 나가는 4박5일의 특별과정이 특히 인기가 있어 그 과정만 현재 6백83기에 13만2천여명이 수료했어요.』
­어떤 사람들입니까. 농군학교란 간판이 붙었다고 농민만 교육생으로 받는건 아니겠지요.
『직업별로 보면 초기엔 역시 농어촌지도자들이 주류였어요. 그러다가 70∼80년대 들어 급격하게 산업화가 진행되고 농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면서 교육생들의 성분구성에도 큰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기업체의 임직원이나 학생들이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밖에 보시는 것처럼 오늘 오후 6시 입교키로 하고 기다리는 제6백84기 특별과정 교육생들도 20개 기업체에서 위탁한 사람들이지요. 연령별로는 20대와 30대가 많고….』
­청백리로 훌륭한 공직자의 전범을 보이고 있는 태국의 잠롱(전방콕시장)도 최근 이곳에 와서 교육받았지요. 실습장에서 사과를 따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만….
『태국사람들이 우리 농군학교에 보통 관심을 보이는게 아니예요. 지금까지 이곳을 다녀간 외국인이 1백70여명 되는데 지난해 50명,올해 39명해서 전체의 절반이상이 태국인이었습니다.
잠롱 전시장과는 몇해전부터 접촉이 있었고 농군학교를 거쳐간 태국인 교육생들도 다 그분이 주선한 겁니다. 그분이 우리 농군학교를 얼마나 부러워하고,또 배워가려고 애쓰는지 몰라요. 이번에도 2박3일의 당초 일정을 자청해 3박4일로 늘려 더 머물렀을 정도입니다.』
­젊어서는 선친이 강요하는 삶의 방식이 싫어 반항도 하고 하셨다던데요.
『선친께선 잠시도 쉴틈 없이 일을 시키셨지요. 늘 「일하지 않고 먹는 자는 도둑」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고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 학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학교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오죽하면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날이 방학하는 날이라고 했을까요. 노동이 지워주는 육체적 고통외에도 「내가 부모의 소유물인가」「이분이 이상에만 기울어 현실을 너무 도외시하는건 아닌가」「부모가 내 삶까지도 책임져줄 수 있는가」 등을 놓고 심각하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청소년기에 두차례나 가출해 선친의 속을 썩여드리기도 했지요.』
­사회적 변화나 시류를 따라 농군학교의 운영방향도 조금은 달라져야 할 것으로 보는데….
『이제 농군학교가 처음 내걸었던 가난의 퇴치란 목표는 거의 이룬 것같고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민운동의 본뜻도 많이 퇴색한게 사실입니다. 국내에선 인간다운 삶의 구현을 위한 정신·이념교육에 치중하고,차차 후진 아시아의 빈곤퇴치운동에 동참하는 쪽으로 운동의 방향을 돌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 방글라데시에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워 3기생을 배출해 냈지요. 태국의 방콕에도 같은 학교를 세울 계획을 짜놓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이 일을 물려주실 작정입니까.
『2남1녀를 두었는데 맏이놈이 시킨 것도 아닌데 대를 잇겠다고 나서니 여간 다행이 아닙니다. 지금 서울대 농대 대학원에서 농촌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답니다.』<정교용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