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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쓴 편지] 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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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면

이, 이렇게 만나뵙게 돼 무척 영광입니다. 저는 플런저 회사를 운영하는 베리 이건입니다. 플런저가 뭐냐면, 그러니까 왜 하수구나 화장실이 막혔을 때 쓰는 고무 빨대가 달린…. 네, 사업은 잘 되고 있습니다. 곧 라스베이거스 호텔에도 납품을 하기로 했거든요.

아, 내가 이 화장실용품 사업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여기 나온 게 아니지. 흠, 저, 그러니까 제가 여기 나온 이유는… 여러분이 바쁘시지 않다면 잠깐 제 사랑 이야기를 들려드려도 될까 해서요.

제가 레나를 만난 건 새벽에 공장에서 일하다 잠시 길거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쉴 때였습니다.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더니 누군가 풍금을 공장 앞에 떨어뜨리고 가더군요. 그러더니 레나가 불쑥 제 앞으로 걸어왔어요. "풍금이 저 길가에 있어요"라면서.

처음에는 차가 고장나 잠시 멈춘 사람이겠거니 했는데 이상하게 그녀의 모습을 자꾸 보고 싶었어요. 그럴 때마다 길가에서 공장으로 들여다놓은 풍금을 눌러 보았죠. 풍금 소리 아시죠. 따뜻하고 푸근하고 넉넉한. 하지만 뭐, 그녀가 날 좋아할 리는 없었어요. 전 제 자신도 저를 싫어할 정도인데요.

전 가끔씩은 그냥 혼자 울고 싶기도 하고 뭔가를 마구 때려 부수고 싶기도 해요. 왜 그러는지는 몰라요. 물론 그러고 나면 후회를 하죠. 제가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걸까요? 그런데 레나가, 레나가 저를 오래 전부터 사랑해왔다는 거예요! 나같은 사람을….

전 제가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는, 누군가 나를 좋아해줄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그 일이 벌어지니까 마치 영화 속에서 권투 선수들이 한대 정통으로 꽝! 얻어 맞고서는 화면이 마구 일렁이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눈 앞에서 분홍색과 오렌지빛의 오로라가 펼쳐지고 귓가에는 풍금 소리보다 더 따뜻한 음악이 들려오고…. 많이 맞으면 평생 그 울렁거림에서 회복할 수 없다는 그런 얼얼한 느낌이 퍼지기 시작하더군요.

레나가 얼마나 예쁘냐고요? 흠, 뭐랄까. 얼마나 예쁜지 망치로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고 싶을 정도예요. 무슨 말이냐고요? 아, 제가 표현력이 좀 달려서….

무엇보다 레나가, 이 사랑이 내게 가져다 준 것은 용기예요. 이렇게 여러분 앞에 나와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나를 괴롭히던 폰섹스 업자를 찾아가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었던 것도 사랑 덕이죠. 누나 일곱명한테 맨날 '게이 보이'라고 놀림당하기만 하면서도 한마디 못했던 제가, 언제나 "미안해요""잘 몰라요"밖에 못하던 제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 같아요.

아, 이제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느라 긴장을 너무 한 것 같으니 영화 속 폭력배에게 외쳤던 그 말을 다시 큰소리로 말하며 끝내고 싶네요.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얼마나 많은 힘이 있는지 모를거야. 나는 내 일생 일대의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용기로 가득차 있다고!"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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