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클로즈 업] 왼팔 '목각 아저씨' 조규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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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탁탁. 망치가 칼등을 때린다. “후~.” 칼이 지나간 자리에 쌓인 나무가루는 사내의 하얀 입김을 타고 붕 솟아올랐다가 떨어진다. 망치는 사내의 오른팔에 탄력붕대로 단단히 묶여 있다. 그의 오른손 노릇을 한지 7년째 된 망치다. 그가 덕수궁 앞길에 출근하기 시작한지도 꼭 7년이 됐다.

그 곳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서각(書刻)을 하는 무우수인(無右手人·오른 손이 없는 사람) 조규현(43)씨. 잔인하리만치 찬 바람이 불던 지난 19일, 그 곳에 갔다.

◆ 그가 없으면 허전하다

오후 2시가 조금 지난 시간. 담벼락에는 늘 그러하듯 서각 작품이 걸려 있다. 그의 작업대에는 새기다 만 글씨가 놓여 있다. 그러나 그는 없다.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듯 허전한 느낌. 10여분이 지나자 그가 자리로 돌아왔다.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오는 길이란다. 여차여차한 이유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기자에게 그는 커피부터 권한다. 그러고 보니 그를 기다리는 동안 얼굴이 얼어버렸다. 작업대 아래에서 그는 살림살이를 꺼낸다. 따뜻한 물이 담긴 보온병, 인스턴트 커피, 커피 섞는 데 쓰는 나무젓가락, 종이컵…. 망치손이 조금 불안해 보였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커피를 타준다.

"날이 추우니 어디에라도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조심스레 권했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제가 없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요. 괜히 저 분들만 귀찮아지시죠. 정말 고마운 분들이에요."

그는 '서울 시티 투어 버스 안내 데스크'를 가리킨다. 그가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은 그 곳에 가서 그의 행방을 묻는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거나 갑자기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그는 매일 이 곳에 나온단다. 그렇다. 그 곳에 그가 없으면 허전하다. 그 곳에 서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 망치를 팔에 동여매다

"손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배우나?"

스승은 매몰찼다. 서각을 배우고 싶다는 그의 청을 물리쳤다. 조씨는 집 인근의 공사현장에 쫓아가 못쓰는 각목을 주웠다. 오른팔에 망치를 동여매고 왼손으론 조각도를 잡았다. 한참을 끙끙댔다. 대나무를 절반으로 쪼개놓은 듯한 모양을 만든 뒤 마디 마디에 '健剛壽福(건강수복)' 네 글자를 새겼다. 다시 스승을 찾아갔다. 그의 솜씨라는 걸 믿지 않았다. 스승의 앞에서 조각도를 들었다.

"그래 넌 꼭 배워야 될 사람이구나."

스승에게 1년간 서각을 배웠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고암(孤岩)'이라는 호를 쓰던 스승이었다. 조씨는 그에게서 서예를 배우던 중이었다. 어느날 스승의 목각 작품을 보고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고 서각을 배우겠다며 매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능적으로 '이게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란 걸 알았단다. 그가 군용 트럭에 치여 오른손을 잃은 건 열살 때의 일이다. 팔도 아닌 손 하나가 없을 뿐이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열 곳을 찾아가면 여덟, 아홉 곳에서 거절당했다. 일손이 남으면 가장 먼저 잘렸다. 스물셋이 되던 해, 생계라도 해결할 생각에 운전면허를 땄다.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일단 돈을 안받고 일을 했다.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뒤 주는 만큼만 받았다. 서예와 서각을 배운 것도 운전을 시작한 뒤부터다. 운전을 하면서 날카로워진 신경을 차분히 가라앉힐 생각에서였다. 생계를 꾸리기도 만만치 않았지만 틈틈이 화선지와 나무를 사다 날랐다.

◆ 덕수궁으로 나오다

10여년간 연습을 한 끝에 1997년부터 덕수궁 앞에 나왔다. 여느 노점상처럼 구청의 단속에 걸리기도 여러 번. 몇몇 신문들이 '가훈 써주는 장애인'이라는 그의 사연을 실어준 뒤부터 단속 걱정을 하지 않고 일했다. 이젠 덕수궁의 상징처럼 돼 버린 그지만 아직 조심스럽다. 행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왜 하필 덕수궁일까.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습니다.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에는요."

전국 각지, 세계 각국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 바로 덕수궁 아니던가.

"세상 사람들에게 한글을 알린다는 긍지, 좋은 작품을 세계 각지로 보낸다는 자부심을 갖고 일해요."

전시된 작품은 거의 한글 서각이다. 초창기에는 한자로 새긴 작품이 더 많았다. 한때는 일본어로 된 작품을 판 적도 있었지만 금방 접었다.

"한글이 제일 무난합디다. 한글을 새길 때 가장 행복하고요."

그는 개인 명패나 문패.상패 등은 파지 않는다. 누구의 손에 흘러들어가더라도 아름답고 의미 있는 글을 새기고 싶어서다.

"이 일로 생계를 꾸리긴 하지만 돈벌이 때문에 일하는 건 아닙니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 좋은 일에 쓰도록 기증하고 싶어요. 의미도 없는 글을 새기며 시간을 허비하기는 싫습니다."

◆ 가훈 무료로 써드립니다

덕수궁 담벼락에 기대놓은 작품의 평균 가격은 10만원. 글자 수와 크기, 음각.양각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 가장 비싼 값에 판 작품은 80만원이다. 나무와 인건비를 합친 가격이다. 다만 가훈 서각은 나무값만 받고 해준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2박3일이 걸린다. 가훈을 붓글씨로는 거저 써준다.

"가훈은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비추는 등대와 같습니다. 인생의 항해를 조심해서 하라는 의미가 있지요."

예전에는 가훈을 대개 한자(漢字)로 새겼단다. 어른들에게 물려받은 가훈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요즘엔 대부분 한글로 가훈을 새긴다. 가족들과 회의를 해서 정한단다. 건강.성실.노력.사랑 등의 단어들은 꾸준히 선호된다. 요즘 경기가 나빠서인지 '빚없이 살자''보증서지 말자'는 글을 새겨 달라는 이도 간혹 있다. 그러면 "그것보다 더 좋은 글도 있습니다"라며 좋은 가훈들을 소개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는 '우리 사랑 서로 귀히 여겨 참사랑 실천하는 한민족 조국이어라(사진(下))'다. 가훈치고는 너무 거창하다.

알고 보니 아직 가정을 꾸리지 못했다. 홀어머니(73)와 단 둘이 살고 있단다.

"남자는 가장이 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잖아요. 이제 겨우 어머니랑 두 식구 먹고 살 만큼 벌고 있습니다."

그가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다. 만약 결혼을 한다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만나고 싶단다. 한 손이나 양 손이 없는 사람을.

"구족화가 오순이씨 같은 분이 딱 좋은데. 아이고, 분수를 알아야지…." 그냥 독신으로 살겠다고 고쳐 말한다.

◆ 무우수인의 소망

날씨가 다소 풀린 지난 22일, 사진 촬영도 할 겸 그를 다시 찾아갔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김기순(39.여.경기도 안양시)씨가 '정직하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글이 새겨진 작품을 하나 산다. 그녀는 작품 말미에 새긴 '무우수인(無右手人)'의 의미를 묻는다. 조씨는 작품에 이름 대신 '무우수인'을 새긴다.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장애인이 서각했다는 걸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김씨는 설명을 듣더니 "자녀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제격"이라 말한다.

"우리는 두 팔 다 가지고 아무 것도 못하는데 대단하시잖아요."

아이들에게 평소 교훈적인 선물만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 아이가 좋아하는 게임팩이나 인형을 사주죠. 하지만 이건 엄마가 주고 싶은 선물이에요."

그녀는 화선지로 곱게 싼 작품을 안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 사라진다. 8절지 크기의 작품 가격이 8만원이었다. 나무 값에 인건비를 합한 정도란다. 조씨의 서각이 수준급에 드는 건 아닌 모양이다.

"아직 멀었죠. 60~70세쯤은 돼야 글씨가 제대로 나올 것 같아요. 뭐든 일순간에 잘되는 건 안 좋습디다."

그동안 새긴 글들에서 얻은 교훈일까.

"공사장에서 벽돌을 쌓은 적이 있어요. 후닥닥 해치우려고 서둘렀죠. 그런데 쌓아놓은 벽돌이 우르르 무너지더라고요."

현실 세계에서 배운 철학이라 잊혀지지가 않는단다.

"황무지에도 꽃은 핍니다. 세상이 황량해도 내가 아름답게 살고자 하면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지고자 하면 행복해지지요.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머니가 건강하시고 저도 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 이상 바라는 건 없습니다."

그는 손으로만 좋은 글을 새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 그가 새긴 '명품'들

1. 늙은이가 되면 설치지 말고/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큰소리일랑 하지도 말고/그저 그저 남의 일엔 칭찬만 하소/묻거덜랑 가르쳐 주기는 하나/알고도 모르는 척 어수룩하소/그렇게 사는 것이 평안하다오//

2. 이기려 하지 마소 져주시구려/어차피 신세질 이몸인 것을/젊은이들에게는 꽃 안겨주고/한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원만하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언제나 감사함 잊지를 말고/어디서나 언제나 '고마워요'//

3. 돈,돈,돈의 욕심을 버리시구려/아무리 많은 돈 가진다 해도/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 거라오/'그 사람은 참으로 좋은 분이셨다'/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살아 있는 동안은 많이 뿌려서/산더미 같은 덕을 쌓으시구려/아무쪼록 오래오래 살으시구려//

4. 그렇지만 그것은 겉 이야기/정말로는 돈을 놓치지 말고/죽을 때까지 꼭 잡아야하오/남들에게 구두쇠라 들을지언정/돈이 있으므로 나를 돌보고/모두가 받들어 모셔준다나/우리끼리 말이지만 사실이라오//

5. 옛날 일들일랑 모두 다 잊으시고/잘난체 자랑일랑 하지를 마소/우리들의 시대는 다 지나갔으니/아무리 버티려고 애를 써봐도/이 몸이 마음대로 되지를 않소/'그대는 훌륭해, 나는 틀렸어'/그러한 마음으로 지내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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