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는 지금이 가장 조심할 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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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19면

경기도 파주 ‘주보라의 집’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선조가 피신하며 임진강을 건널 때 불을 질러 길을 밝혔다는 화석정(花石亭)을 지나서도 한참을 굽이 돌아야 했다. 주보라의 집은 최근 완공된 장애인 복지시설. 이곳으로 김창근(57ㆍ사진) SK케미칼 대표이사 부회장이 직원들과 자원봉사하러 갔다는 소리에 달려갔다. 좀처럼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그를 만나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SK그룹 성장의 일등공신이자 구조조정의 주역이다. 그룹 자금담당으로 고(故) 최종현 회장을 도와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 등 SK그룹 영토 확장을 총지휘했다. 초고속 승진으로 50대 초반 SK㈜ 사장에 올랐고, 구조조정본부장을 맡아 ‘위기의 SK호’를 이끌었다. 특히 그는 그룹 내에서 위기 때마다 활로를 뚫은 ‘난세의 영웅’으로 불린다.

‘밸런스 경영론자’ 김창근 SK케미칼 부회장 단독 인터뷰

현장에서 만난 김 부회장은 “따로 인터뷰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기자도 작업 조끼를 빌려 입고 바싹 붙었다. 그의 임무는 창문 새시의 포장 테이프 떼어내기. 예순을 바라보는 그가 가볍게 몸을 날려 창틀 위로 뛰어올랐다. “더 젊어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여기까지 온 걸 보니) 더 노련해진 것 같다”고 맞받아쳤다. 체력이든 노련함이든 그를 따라가긴 힘들다. 2년 전 심신수련장에서 만났을 때 이미 확인한 바다. 당시 그는 한쪽 팔로 팔굽혀펴기를 십수 번이나 거뜬히 해보였고, 이리저리 돌려 묻는데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20년 경력의 ‘기(氣)체조 전도사’다. 매일 아침 임직원과 수련장에서 기를 모은다. 태권도 4단에 근육으로 균형잡힌 체격의 그는 눈빛만 봐도 내공이 느껴진다.

모은 기는 경영에 뿜어냈다. 강력한 추진력으로 2003년 팍스넷 지분 인수를 비롯해 SK텔레콤-KT 지분 맞교환, SK네트웍스 사업 조정 등 당시 그룹 내 산적한 현안을 해결했다. 외환위기 뒤 그룹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구조조정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덕분에 위기 때도 그룹이 돈 걱정을 안 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SK케미칼로 와서도 능력을 보여줬다. 폴리에스테르(PET) 기술에서 신사업을 파생시켜 생명과학과 정밀화학 중심 회사로 탈바꿈시켰고, 업계 최초로 폴란드에 PET 공장도 지었다. 생명과학 부문 매출 비중은 30%까지 높아졌다. 그가 부임한 2004년 1만원대에 머물렀던 SK케미칼 주가는 현재 7만원까지 치솟았다.

재무통답게 그는 숫자의 달인이다. 각 사업의 연도별 실적은 물론 몇 년 몇 월에 어떤 사업이 시작돼 몇 년 후 어느 정도로 성장했는지를 무서울 정도로 술술 외웠다. 심지어 한국이동통신 인수 당시 인수 금액ㆍ주식 수ㆍ가입자 수 등도 자료 한 장 보지 않고 끝자리까지 정확하게 기억해냈다.

그에게 경영은 전투다. “싸움은 주먹으로 하지만 전쟁은 얼마나 시야를 확보하느냐가 승패를 좌우합니다.” 한국이동통신 인수도 그렇다. “당시 인수 가격은 감당하기 힘들었는데도 우리는 5년 후에 인수하는 것보다는 싸다는 논리로 인수를 결정했습니다.” 멀리 내다보고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경영의 기술이라는 얘기다.

전투는 힘만으로는 안 된다. 그는 한쪽다리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체력이 아니라 밸런스입니다.” 강함과 유연함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유연함에 치우치면 약해지기 십상이고, 강한 것에 치우치면 경화되게 마련이죠.”

그는 맨손으로 새시에 붙은 포장 테이프를 벗겨내며 “이런 사소한 작업에도 이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다”고 했다. “처음엔 잘 벗겨지지 않아 연장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자칫 새시에 스크래치를 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뒀죠. 손톱만한 연장도 없습니다. 벗겨낼 비닐보다는 강하고 새시보다는 강도가 약하니까요.”

그 역시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했다. 눈은 매섭기 짝이 없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쾌속 승진으로 그룹 실세에 올랐지만 발걸음은 누구보다 여유롭다. 그에겐 경영도 밸런스다. “현재 SK는 어느 때보다도 잘나가고 있습니다. 실적도 주가도 탄력을 받고 있죠. 그러나 지금이 가장 조심할 때입니다. 자신감과 겸손함이 밸런스를 유지하지 못하면 큰일이죠.” 자신감이 지나치면 자만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했다.

그는 순간 자만에 빠져 위기를 맞은 2003년의 아픔을 떠올렸다. “두 분 회장과 제가 차례로 구속되던 그때, 우리는 하늘에 빌었습니다. ‘우리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말이죠.” 기도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그 행복을 세상 모든 이들과 나누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온 것도 그날의 기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나눔은 어려울 때 실천하는 것입니다.” 울산 대공원은 그런 깨달음을 준 사례다. SK㈜는 90년대 후반, 공장이 있는 울산 시민들에게 공원을 지어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2003년 그룹이 위기에 직면하자 시민들조차 물 건너간 사업이라 생각했다. 이때 사장이던 김 부회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공사를 마무리지어라”고 했다. 낭떠러지에서 이웃의 행복을 생각한 것이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자 이번엔 울산 시민들이 ‘SK 주식 갖기’ 운동을 벌였다. “행복은 아마도 그렇게 나누는 것인가 봅니다.”

“따지고 보면 1000억원짜리 공원은 아무것도 아니죠. 그동안 울산에서 공장 짓고 번 돈이 얼마인데…. 또 시민들이 주식을 사면 얼마나 사겠습니까. 그분들은 우리의 마음을 산 겁니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 그게 행복 나눔이죠.”

그에게 행복은 효율로 따질 수 없다. “연탄 800장 나르는 것보다 8000장 사서 주는 게 낫겠죠. 직원들이 여기에 와 서툰 솜씨로 일하는 것보다 성금 거두는 게 맞고요. 경영하는 사람이 그걸 모르겠습니까.” 어쩌면 더 높은 효과가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엔 심신수련은 나를 위한 것이고, 자원봉사는 남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해진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하루 4시간 수면’은 그의 철칙이었다. 회사는 집이었고, 그래서 늘 가정엔 소홀했다. “요즘 직원들을 보면 아내 눈치 보느라 고생이 많더군요. 사실 전 그런 것 모르고 살았습니다. 바빠서 못 들어간다고 전화하면 집사람이 되레 ‘몰래 눈 좀 붙이라’고 걱정할 정도였죠. 20권도 넘는 가족 앨범에 내 사진은 2장도 없을 겁니다.”

‘단사표음(簞食瓢飮)’. 단팥빵 한 개와 생수 한 병으로 새참을 마친 그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돌이켜보면 이룬 것도 많고 잃은 것도 없지 않다. 야망도 성공도 때론 신화도 있었다. 그리고 고통과 반성도 있었다. “체력 좋다’는 얘기는 그만 듣고 싶습니다. 경영자가 팔다리만 튼튼해서야 되겠습니다. 머리와 가슴도 중요하죠.”

그가 회한을 느끼고 있는지는 몰라도 아직 지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픈 과거까지 모두 자신의 것으로 포용할 만큼 강한 마음을 얻은 듯하다. “다 지난 일이지만,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게 전문경영인인 나의 책임입니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다시 화석정을 보았다. 화석정이 등불이 돼 주지 않았다면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밤, 선조는 강을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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