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MD 레이더 공동 기지'역제안에 미국 "미사일 방패 무력화 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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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미사일방어(MD) 시스템 공동기지 건설 역제안에 미국이 허를 찔렸다.

푸틴 대통령이 7일 G8(주요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장에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미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의 아제르바이잔에 공동으로 방어 미사일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자"고 전격 제안한 데 대해 미국에선 당혹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푸틴은 "미국이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미국의 동유럽 MD 시스템 구축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미사일도 유럽을 겨냥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부시는 "흥미로운 제안"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제안을 수용할지는 밝히지 않았다.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도 "푸틴 대통령이 미국에 협조할 용의를 표명했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인 얘기는 피했다.

미국은 동유럽의 폴란드에 MD 요격시스템 10기를 배치하고, 체코에 레이더 기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이란.북한 등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한 것이란 명분을 내세웠다. 그런데 불과 하루 전까지 이를 극력 반대해 온 푸틴 대통령이 전혀 예상할 수 없던 '공동 기지' 카드를 꺼내는 바람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의 제안은 MD 시스템 확대를 둘러싸고 미국과 파국을 맞는 극한상황을 차단하는 게 목적으로 보인다.

아울러 러시아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올 미국의 미사일 기지를 공동의 무기로 전환해 안보를 보장받고 러시아의 위상도 확대한다는 다각적인 의도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워싱턴의 군사전문가들은 "MD 시스템의 동유럽 배치 자체를 막으려는 시도"라며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보수적 성향의 헤리티지재단 러시아 연구팀장인 예브게니 폴크는 "푸틴의 제안은 MD 시스템 논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라며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테오도르 포스톨 MIT 교수도 "미국이 유럽 각국의 '미사일 방패'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을 막아 보려는 게 러시아의 의도"라며 "기술적으로도 미국이 원래 계획대로 체코에 MD 레이더를 배치하면 전 세계에서 더욱 많은 영역을 담당할 수 있지만 더 멀리 떨어진 아제르바이잔에 레이더를 설치하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푸틴의 제안은 MD 시스템을 둘러싸고 악화일로로 치닫던 미.러 간 갈등을 모처럼 진정시킨 타협안이란 점에서 무조건 거부하기도 어렵다는 데 미국의 고민이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7월 워싱턴에서 열릴 미.러 정상회담까지 입장 표명을 유보하면서 이번 제안의 배경과,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의 이해득실을 면밀히 따진 뒤 대응 방향을 정할 것으로 전망된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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