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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타' '비사발'과 저작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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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알루미늄 철망을 이용해 달리는 말들을 형상화한 작품은 박 작가가 2002년 2000여만원을 받고 호텔에 판 것이다. 호텔 측은 라운지에 작품을 배치했다. B사와 광고대행사는 A호텔에 임대사용료 350만원을 내고 아파트 광고를 찍었지만 배경에 들어간 '작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게 실수였다. 작품을 샀더라도 저작권은 어디까지나 작가에게 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3부는 지난달 17일 "B건설사와 광고기획사는 박씨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박 작가는 "돈 때문이 아니다. 창작자의 권리를 인정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뮤지컬컴퍼니의 창단 기념 작품인 '사랑은 비를 타고'는 설도윤(기획).김용현(제작).박해일(연출)씨가 힘을 합쳐 1995년 초연됐다. 설도윤(현 설앤컴퍼니 대표)씨는 집을 팔고 퇴직금까지 보태 3억여원을 작품에 쏟아부었다. 창작 뮤지컬로는 처음으로 라이브 반주도 했다. 관객의 폭발적인 호응 덕에 '사비타'라는 애칭이 붙고 앙코르 공연을 거듭하면서 순수 창작 뮤지컬로는 처음으로 1076회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초연 당시 작곡과 각본을 맡았던 C씨와 D씨가 2004년 다른 기획사와 계약을 하고 재공연에 들어갔다. 박씨 등은 "저작권을 침해당했다"며 C.D씨를 상대로 공연 금지 등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그러나 1심에 이어 서울고등법원도 지난달 22일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뮤지컬은 악곡.각본.가사.안무 등이 각각 독립된 저작물로서 보호 대상이 된다"며 C.D씨의 저작권을 인정했다. 제작자나 연출가에게는 저작권이 없다고 본 것이다. 박해일 감독은 "억울하다. 이러면 누가 순수 창작 뮤지컬을 하겠나"라고 하소연했다.

원조 '사비타' 제작자 측의 가장 큰 패인은 내남없이 배곯아 가며 연극에의 열정만 불태우던 시절의 어수룩한 법의식이었다. 박 감독은 "12년 전만 해도 작가.작곡가와 별도로 계약서를 쓰는 관행이 없었다"며 "이렇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밝은 최정환 변호사는 "영화는 저작권법의 영상저작물 특례 조항 덕분에 영화사가 저작권을 갖지만 뮤지컬은 다르다"며 "제작자가 저작권을 가지려면 스토리 작가와 미술가.음악가.연기자와 각각 별도 계약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으로 설도윤 대표는 "계약서를 쓰지 않은 것은 잘못이지만, 제작자의 공동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법도 문제"라며 "뮤지컬 산업이 발전하려면 관련법이 속히 정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팬들이 '비사발'로 줄여 부르는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이야기다. 서울중앙지법은 2005년 12월부터 '비사발'을 공연해온 기획사 대표가 올 2월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을 시작한 '비사발S'를 상대로 낸 공연 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법원은 역시 공연의 안무.음악.무대장치의 저작권은 제작사 아닌 개별 창작자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미술이든 뮤지컬이든 문화예술계도 저작권에 관한 한 '요순시절'은 이미 갔다. 요즘엔 TV 개그 프로그램이 만들어내는 유행어도 저작권을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김미려의 유행어 "김 기사, 어~서"를 다른 성우들이 슬쩍 녹음해 라디오 광고에 써먹은 일을 상기하면 충분히 일리 있다. 요즘 인기인 "뭔 말인지 알지"도 마찬가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면 저작권 문제는 더욱 빡빡해진다. 누구는 "그놈의 헌법"이라 했다지만, 예술가들이 혹시라도 저작권법을 "그놈의 법"이라고 얕보다간 큰코다치는 세상이 됐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