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의 겉과 속/박병석 정치부차장(특파원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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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실리 좇는 중국인… 서둘수록 손해/투자는 국가차원서 냉철히 해야
중국붐이 일고 있다. 한국­중국수교와 노태우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중국은 마치 먼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오랜 친구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 듯한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한­중간 화해의 첫 시발은 83년 5월 중국민항기의 춘천불시착 사건이었다.
그 후의 양국간 협상을 돌이켜보면 사안에 따라 우리측 주장이 상당히 반영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대부분 중국측 페이스에 따라갔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한국인과 중국인 개개인을 1대 1로 비교하면 중국인이 좀 촌스럽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결국 실속은 중국측 몫이 된 것이다. 그 원인은 체제의 차이나 민족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내부의 문제점으로 귀결된다. 우리 내부의 약점중 핵심은 조급함이다.
정부는 공산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이 전적으로 북방정책에 따른 공로처럼 자랑하고 있다. 정부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냉전체제의 붕괴라는 세계적 조류가 근본원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정부가 헝가리나 소련과 수교할 때 제공했던 차관도 관계개선시기를 다소 앞당기는데 기여했겠지만 사후적으로 보면 과다한 부담을 떠안은 결과가 됐다.
한중수교과정에서도 우리측은 늘 조급함을 그대로 노출했다. 그때마다 중국측은 「물이 흐르면 자연히 도랑이 생기는 법」이고 「오이가 익으면 저절로 떨어진다」며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정부는 한중수교가 급작스레 이뤄진 것은 오히려 중국이 서둔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보면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중국측 입장에서 보면 수교시기의 결정권은 이미 사실상 한국정부의 위임장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중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시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북경에서 만난 중국의 관계전문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한중수교로 한국은 대만을 잃었지만 중국은 무엇하나 잃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중국입장에서 보면 89년 천안문사태후의 외교적 고립탈피,대만의 달러를 앞세운 외교공세 제동,제2개혁·개방을 표방하고 있는 14차 당대회를 앞둔 국내정치상황 등으로 볼때 지금 시점이 한국과 수교하는데 최적기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중국측은 노태우대통령의 방중때 공식·비공식 수행원과 언론인·경호원 등의 규모가 5백명선에 이른다는데 대해서도 「통큰 한국」보다는 「겉치레 한국인」의 모습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해서 한중수교나 노 대통령 방중이 갖는 의미가 적다는 것은 아니다. 수교는 양국관계의 완결이 아닌 새로운 관계의 출발선이기 때문에 지난 일을 거울삼아 새출발의 단추만은 제대로 끼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동안 국교만 수립되면 양국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일시에 제거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제 구체화된 각론을 펼칠 때가 된 것이다.
관리나 경제인들이 중국인들과 건배를 거듭하며 우호도모를 위한 덕담이나 나누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그동안 쌓은 적잖은 경험을 바탕으로 호혜평등의 원칙아래 장기적 안목에서 실리를 찾아 주판알을 놓아야 할 때다.
수교와 대통령 방문으로 분위기는 좋아졌지만 우리로서는 개선해야 할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상품의 대중경쟁력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세계적인 경제블록화 추세로 보나 북한과의 사이로 보나 중국과의 관계를 심화,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입장이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적극적이고 냉철한 자세가 요구된다.
이제 무역·투자 등 대중경제협력은 우리 상사가 경쟁차원을 넘어 대한민국과 다른 나라와의 국가간 차원이라는 큰 시각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한중관계는 냄비속의 물처럼 쉽게 끓었다 식어버리는 일시적 중국열이 돼서는 안된다.
새 단추는 「군자의 관계는 물처럼 담담하다(군자지교담여수)」는 기조위에서 끼워져야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로선 남북한을 저울질하는 「꽃놀이패」같은 중국측 카드가 활용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북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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