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의 저편을 읽는 네 가지 시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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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14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중년 남자가 고향집을 찾아간다. 남자는 생의 시작이 언제였는지 궁금하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뒤꼍 문턱에 아침 햇빛이 비칠 무렵’이라고만 알려주신 터였다. 남자는 상념에 잠긴다. 죽는다는 건 시계가 걸렸던 자리 너머, 시간 저 너머로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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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자신의 탄생과 성장과 죽음, 그리고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모습을 환영으로 본다. 그렇다면 죽음은 끝이 아니다. ‘나는 맘속으로 조용히 문 밖의 과꽃을 향해 물었다. 맨드라미를 향해 물었다. 혹시 네가 나 아닐까. 햇살과 바람과 하늘에 물었다. 혹시 네가 나 아닐까. 너희들이 나라면 나는 언제 어디에고 있을 수 있을 텐데’. 남자는 비로소 죽음의 품에, 아니 영원의 품에 편안하게 안길 수 있겠다 싶어진다. 이 남자는 구효서 소설집 『시계가 걸렸던 자리』(창비)에 실린 표제작의 주인공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누구나 겸허하고 솔직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각별하게 다가온다. 미셸 슈나이더의 『죽음을 그리다』(아고라)에 문인과 사상가 23명 삶의 마지막 풍경이 실려있다. 마지막 말은 제각각이지만 뜻밖에 단순하다. 앙드레 지드는 “좋아”, 에밀리 브론테는 “아니, 아니”, 아나톨 프랑스는 “어머니, 어머니”, 기 드 모파상은 “어두워, 아! 어두워” 등이다.

그런 마지막 말에 어떤 깊은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은 없다. 죽음은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 말의 뜻은 오해되기도 한다. 철학자 칸트는 “그만”이라고 했다. 철학자다운 심장한 뜻을 담은 말은 아니다. 설탕물에 포도주 탄 것을 숟가락으로 떠 먹여주던 하인에게 그만 먹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고, 유일무이하며, 완전히 고독하다. 그런 죽음의 본질을 이 책을 통해 느끼고 알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 진짜 속내야 모를 일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떠올리기도 싫은 이 두려운 죽음. 그런데 왜 김열규(국문학) 서강대 명예교수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궁리)를 권하는 걸까. 한국인에게 죽음은 공포와 부정(不淨)이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 하지 않았는가. 남의 집 부고를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고, 부모와 남편의 죽음은 자식과 아내에게 죄의식으로 남았다. 죽음은 원한을 지닌 혼령, 즉 원령(怨靈)과 결부되면서 공포가 커졌다.

저자는 죽음의 공포를 덜어내고 죽음과 벗할 것을 권한다. 죽음과 벗하는 것의 의미는 뭘까. ‘오직 한번뿐이니까 성실해야 하고 진지해야 하는 삶, 그건 죽음이 안겨준 선물이다. 죽음의 거울에 비쳐서 더욱 더 확연해질 삶의 얼굴’.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튼튼해진다.

다른 사람의 죽음이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부모님이나 형제, 배우자의 죽음이 바로 그렇겠지만 스승의 죽음이라면? 미치 앨봄은 대학 졸업 후 16년 만에 TV에서 온몸이 서서히 굳어가는 루게릭병에 걸려 있는 스승 모리 슈워츠 교수를 발견한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스승을 매주 화요일에 방문한다. 그 방문의 기록이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세종서적)에 담겨 있다.

스승 모리 교수는 이 교실 밖 특별 강의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리 교수는 말했다. ‘죽음이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앨봄은 또 이렇게 스승을 회상했다. ‘그는 나를 보면 밝고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선생님은 누구와 함께 있으면 완전히 그와 함께였다’. 완전한 고독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모리 교수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잃지 않고 소중히 가꾸었다. 영혼의 불멸과 다른 어떤 인간성의 불멸 같은 게 있다면 모리 교수가 그런 불멸의 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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