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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루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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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뉴욕의 명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높이(102층.381m)뿐만 아니라 공기(工期) 단축 면에서도 건축사에 족적을 남긴 데는 미 동부 인디언 원주민들의 활약이 한몫했다. 3000여 명의 현장 근로자 가운데 모호크라는 부족이 많았는데 희한하게 고소 공포증이 거의 없었다. 200~300m 높이의 골조에 대롱대롱 매달려 리벳을 죄는 데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이렇게 해서 인류 최초의 100층대 마천루가 불과 400여 일 만에 우뚝 선 게 1931년의 일이다.

100층은 고사하고 10층 정도의 주거용 건물을 짓겠다고 건축가들이 엄두를 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불과 40여 년 전이다. 대화재로 폐허가 된 시카고 중심가에 철골조를 활용해 지상 10층으로 올린 게 '홈 인슈어런스 빌딩'이다. 1885년 근세 최초의 고층 오피스 빌딩으로 기록된다. 그 전까지 쓴 석재나 벽돌 건자재로는 하중 때문에 10층 넘는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20세기 후반 들어 마천루의 키재기 경쟁은 더욱 달아올랐다. 훗날 9.11 테러에 희생된 뉴욕 세계무역센터(417m)는 72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41년 만에 두 번째로 밀어냈다. 2년 뒤 시카고의 시어스 타워(442m)가 최고층 빌딩을 또 바꿨다. 이후 하늘과 가장 가까운 건물은 고소 공포증을 잊은 듯한 아시아의 독무대가 됐다. 98년 콸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452m), 2004년 타이베이 101 빌딩(509m)이 잇따라 위용을 드러내면서 최고층 빌딩의 교체 주기도 숨가쁘게 짧아졌다. 삼성건설이 시공해 2009년 완공 예정인 중동의 버즈 두바이 빌딩(160층.830m)은 종전 최고층보다 300m 이상 높아 상당 기간 지존으로 군림할 것이 확실하다. 한국의 대도시들도 근래 100층 이상 빌딩의 건립 계획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동북아 중심이라는 경인지역을 대표할 만한 100층대 랜드마크 빌딩 하나쯤 나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여론도 강하다.

동양의 마천루 열풍에 대한 미 뉴욕 타임스의 촌평이 눈길을 끈다. '하루속히 선진국이 되고픈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지나친 조바심에 대한 경고라면 귀담아들을 구석도 있다. 미국이나 유럽은 이미 '고고익선(高高益善)'의 고층 경쟁보다 건물의 디자인과 실용성에 치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