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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시간에 ‘밤 문화’ 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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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해가 중천인데 거나한 ‘낮술 자리’가 벌어지는 곳이 있다. 수도권 먹을거리 유통량의 절반을 조달하는 서울 가락시장 일대다. 이곳에서 일하는 상인 2만여 명은 아침 8시 퇴근하면서 인근 대폿집·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풀고 ‘카페’라고 불리는 요정에서 손님 접대를 한다. 그래서 이곳의 ‘피크 타임’은 낮 12시다. ‘출근 시간’에 ‘밤’이 열리는 가락시장의 독특한 ‘낮 문화’를 둘러봤다.


“이 일을 시작한 지 8년차입니다. 30년 넘게 일한 ‘귀신’이 수두룩해 저는 명함도 못 내밀지만 그래도 ‘준치’는 됩니다. 그런데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일과가 있다면 아침 7시40분 퇴근길에 마시는 맥주 넉 잔일 것입니다. 거꾸로지요.”

5월 9일 아침 8시 서울 가락본동 가락시장 앞 상가 지하. B호프집은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가락시장에서 오이 도매업을 하는 L(42)씨도 동료 세 명과 함께 맥주잔을 비우고 있었다.

“저녁 7시 퇴근해서 소주 한잔 걸치는 직장인과 다를 것이 없어요. 저희도 퇴근하면서 한잔 걸치는 겁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단지 낮과 밤이 바뀌었을 뿐이죠. 가끔 출근하는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 보지만 저희는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이 도매업을 하는 그는 한 달에 대략 400만 원의 수입을 올린다.

“집이 잠실동이에요. 일 마치고 한잔하고 들어가면 낮 1시쯤 되죠. 그때부터 잠을 자고 다시 저녁 7시 반쯤 시장으로 출근합니다. 오이 경매가 9시 반쯤 시작되면, 제 본격적인 일과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셈이지요. 새벽 내내 낙찰받은 오이를 팔면 아침 7에서 9시 사이가 됩니다. 하루 장사를 마치고 스트레스 풀려고 일주일에 두세 차례는 이 호프집에 옵니다.”

일반 샐러리맨의 ‘밤 문화’가 이곳에선 ‘낮 문화’다. 이곳에 근무하는 상인만 2만여 명. 서울 무역센터에 근무하는 샐러리맨과 맞먹는 규모다. 그만큼 ‘퇴근 시장’이 크다는 것이다. 주로 낮장사를 하는 각종 음식점과 유흥상가 숫자만 200여 개에 달한다.

가락시장 상인들의 ‘단골집’은 시장 맞은편 송파대로 왕복 10차로 길을 건너야 나온다. 상인들의 퇴근 문화는 오전 9시 이곳에서 시작된다. 아침 9시, 이미 대부분 상가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도 적지 않다. 새벽 경매시장에서 장사를 마친 뒤 아침에 나오는 상인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생산자들을 대상으로 24시간 영업하는 것이다.

이곳은 낮이 오히려 밤보다 화려하다. 해가 훤히 뜬 대낮에도 ‘단란주점’ ‘마사지방’ ‘대화방’ ‘호프집’ 등의 네온사인이 줄기차게 돌아간다. 특히 단란주점, 마사지방 그리고 PC방이 함께 모여있는 건물은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자리를 옮기지 않고 한 건물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사지방·대화방도 만원사례

주변 노래방은 상인들이 자주 애용하는 곳이다. 노래방 대부분은 도우미를 두고 영업하고 있다. 오전 10시 20분, 송파대로 앞에 위치한 상가건물. 미니스커트를 입은 5~6명의 여자가 쏘나타 승용차에서 내려 바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지하에 위치한 A노래방. 노래방 도우미들이었다.

방은 이미 만원이다. 두 팀은 남는 방이 없어 돈을 미리 계산한 채 벌써 20분 넘게 기다리고 있다. 방은 모두 11개. 손님이 적어도 50명은 족히 되며 대부분 가락시장 상인이다. 아침 8시에 문을 연다는 노래방 주인은 “이곳 가락시장 상인들의 수요가 있으니까 도우미를 부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노래방뿐 아니다. 식당과 호프집이 밀집한 골목 사이사이엔 이른바 ‘방석집’으로 불리는 요정이 ‘ㄱ’ 자로 도열해 있다. ‘OK○○’ ‘에쿠○’ 등의 간판이 붙어 있다. 시장 상인들은 이곳을 ‘카페’라고 부른다. 가락시장에서 양배추 도매와 중개업을 하는 K(35)씨는 “이곳을 카페라고 상인들끼리 부른다. 술 한잔 먹고 분위기 낼 때 가는 곳”이라고 말했다.

아침에 문 열고 밤 9시에 끝내

아침 9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종업원들은 ‘카페’ 밖으로 나와 맥주병을 옮겼다. 10곳 남짓한 방석집들도 왁자지껄하다. 가게마다 이미 꽉 찬 듯하다. 이 카페들은 아침 8시에 문을 열어 밤 8시, 늦어도 밤 9시면 문을 닫는다. 일반 술집과는 정반대의 시간표대로 영업하는 것이다.

가락동 우성아파트 인근 상가 생맥주 전문 B호프 가락시장점. 매일 아침 8시에 문을 여는 이곳의 아침은 언제나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한다. “9시에서 10시 사이는 기다리는 손님들이 있을 정도로 장사가 잘될 때”라고 했다.

“가락시장에서 3년째 장사하고 있습니다. 새벽장사를 마치고 오시는 가락시장 상인들이 저희 손님이죠. 매출 또한 이 때문인지 밤보다 낮에 더 높은 편입니다. 장사가 되는 건 상인들 덕분입니다.”

버섯 도매업을 한다는 J(40)씨. 월 400만원 정도 번다는 그는 한 번 술을 마실 때 평균 5만~8만원을 지출한다. 일주일에 3번, 한 달에 12번 정도 마시는 셈이니 한 달 술값으로 적게는 60만원에서 많게는 100만원 가까이 쓴다는 말이다.

이는 그의 수입에서 4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큰 지출이다. 그는 “장사가 잘되는 날은 잘되는 대로 기분 좋아서 한잔, 안 되는 날은 안 되는 대로 속상해서 한잔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보통 샐러리맨이 한 달 술값으로 20만~30만원을 쓰는 데 비해 J씨의 술값은 과도한 편이다.

이 일대 식당이나 유흥업소들의 장사가 잘되다 보니 많은 가게가 오픈을 대기하고 있다. 권리금도 올랐다. 어떤 곳은 권리금만 1억원이 넘는다. 이곳 상인들은 “요즘 불경기라 3~4년 전에 비해 매출이 20% 정도 고꾸라졌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경기가 나빠 고전하고 있는 다른 지역 상가에 비해 이곳은 장사가 훨씬 잘되고 있는 듯 보였다.

가락시장 상인들의 일은 고되다. 밤에 각종 야채나 청과물을 사고 파는 일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렇다 보니 상인들은 ‘업무 시간’에도 자주 술을 마신다. 이들의 욕구를 이용해 등장한 게 잔술 장사. 대략 막걸리는 한 사발에 2000원, 소주는 종이컵 한가득이 1500원이다. 비싼 편이다. B(58·여)씨는 하루에 서른 잔 넘게 잔술을 판다. 과자나 음료수를 함께 팔면서 하루 5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

“안주는 딴 게 없어요. 여기 준비한 김치 한 접시씩 먹고 한잔 마시는 거죠. 요즘 단속이 심해 눈치 보면서 장사를 해야 됩니다”라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가락시장 상인들도 손님 접대는 ‘확실하게’ 한다. 바이어나 특별한 손님이 오는 등 접대해야 할 때는 가는 장소도 다르다. 대개는 송파대로 건너 K호텔 지하 룸살롱을 애용한다고 한다. 호텔 로비에서 만난 여종업원은 “룸살롱에서 한잔하거나 피곤한 눈을 붙이러 오는 상인들이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시장상인들도 샐러리맨과 다르지 않다. 하루 노동의 고단함과 피로를 한잔 술로 푼다. 단지 그 모습이 늦은 저녁 시간부터가 아닌 이른 아침부터 이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서울특별시 농수산물공사 최병학 실장은 “남들 출근 시간이 이곳 상인들의 퇴근 시간”이라며 “가락시장 상인들의 ‘낮 문화’는 샐러리맨들의 ‘밤 문화’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거래의 90% 새벽에 이뤄지는 가락시장은…

1985년 6월 19일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공영 도매시장으로 개장한 먹을거리 유통의 메카다. 수도권 먹을거리 유통량의 50%, 전국 공영 도매시장 유통량의 40%를 책임지고 있는 이곳은 거래의 90%가 새벽 경매시장에서 이뤄진다. 16만 평이 넘는 부지에서 하루 거래물량 7278t, 거래금액 106억원, 이용인원 14만 명이 넘는다. 현재 5000여 개의 업체와 2만여 명의 상인이 장사를 하고 있다.

가락시장 동문 송파대로 건너편에는 200여 곳의 상가가 밀집해 있다. 이 일대에는 음식점 68, 노래방 19, 요정(料亭) 19곳이 있다. 또 노래주점 18, 호프집 17, 소주방 11, 커피숍 21곳이 밀집해 있다. 성인 PC방 13곳에 안마시술소도 9곳이나 된다. 이발소, 성인 오락실도 대여섯 곳이나 불을 활짝 켜고 ‘아침 손님’을 기다린다.

이영민 기자 (jly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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