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는] 벼랑으로 밀려나는 지방공단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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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국가산업단지와 지방산업단지는 산업화 과정에서 건설돼 그동안 우리 경제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현재 전국의 산업단지는 모두 4백85개로 전체 제조업 사업체수의 22.5%, 종업원의 41.9%, 생산액의 55.9%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산업화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산업단지라 해야 구로공단을 포함해 경인 지역 몇 곳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동남권 산업벨트에 위치한 구미.울산.창원 등은 국내의 대표적 산업도시들이다. 인구 4만~5만명의 도읍에 지나지 않던 이 지역들은 이제 전자.자동차.기계 등 한국 경제의 주력산업 집적지로서의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도시들은 연구개발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공단 지대에 불과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계연구소.승용기술연구센터 등 기존에 있던 연구기관마저 수도권으로 옮겨간 상태다.

자립형 지방화가 이런 상황에서 가능할 수 있겠는가. 자립형 지방화란 지역 내에 혁신능력을 갖추고 지역 특성에 맞는 고유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혁신능력을 갖추지 못할 경우 이들 지역은 공단 지대로서의 비교우위를 잃는 시점에 탈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급격히 몰락할 가능성이 크다.

좀더 구체적 사례로 울산 지역을 살펴보자. 울산시는 자동차산업 고도화를 위해 매곡동 일원 16만여평 부지에 지방산업단지를 조성해 자동차부품업체들을 유치하려 하고 있다. 울산시가 추진하는 오토밸리 사업의 일환으로서 단지 내에 자동차부품혁신센터의 설립, 자동차 관련 연구기관들의 유치를 함께 추진하고 있다. 자동차부품업체들을 일정 지역 내에 집적시키는 게 아니라 상호협력을 증진시킴으로써 혁신능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그러나 완성차업체인 현대자동차는 오토밸리 사업에 별 관심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이미 승용기술연구센터를 경기도 남양으로 옮겨간 상태에서 사업 참여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이는 부품업체의 기술능력 향상이 완성차업체인 현대자동차의 경쟁력 증대에 기여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자동차의 참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매곡지방산업단지는 부품업체들의 단순집적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울산시는 또 미래산업 육성을 위해 신항만 배후지역인 울주군 청량면 일대에 76만여평의 대규모 신산업단지를 조성해 신소재. 정밀화학 등 지역적 특성을 살린 첨단산업 집적지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울산시는 이 일대를 자유무역지역으로 지정받아 대규모 외자를 유치해 신항만과 연계된 수출기지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그러나 다른 지방공단들과 마찬가지로, 울산의 신산업단지 또한 첨단기업이 입주할 만한 여건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인근에 대학.연구소 등 연구개발을 위한 기반시설뿐 아니라 교육.주거환경 등 고급 인력이 가족 단위로 생활할 여건도 미흡하다. 설사 첨단산업의 기업들이 입주한다 하더라도 단순 생산 기능만 존재할 가능성이 큰 셈이다.

이처럼 한국의 대표적 산업도시라고 할 울산에서조차 지방공단이 혁신 클러스터로 발전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교통부가 지난 7월 내놓은 2차 산업입지공급계획은 산업공단의 지방 확대, 첨단산업 용지의 공급 확대 등 장밋빛 계획으로 채워져 있다. 1차로 공급된 공장부지 중 전국에 3백79만평이 미분양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정말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방공단을 살리려면 단순한 양적 확대가 아니라 지역특성화에 기초한 혁신 클러스터로의 육성을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우선 한곳에서라도 경쟁력을 갖춘 지방공단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한 지역의 성공은 자연스럽게 제2, 제3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조형제 울산대 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