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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24. 이병철 회장 <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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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병철 회장이 샷을 한 뒤 타구를 보고 있다. [중앙포토]

폭행사건이 있었던 그 주 토요일에 나는 1969년 한국프로골프(KPGA)선수권대회 정상에 올랐다.

2년 연속 우승컵을 차지한 나는 의기양양했다. '별 일 없겠지'하는 생각으로 안양컨트리클럽에 출근, 일하고 있었다.

라운드를 하러 나온 이병철 회장에게 평소처럼 인사했다. 그런데 이 회장이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때 이 회장은 손원일 제독, 이재형 대림회장, 안희경 변호사 등과 라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분들은 "한 프로 우승 축하해요" "역시 한국에서는 한장상이 최고야"라며 격려해 주는데 이 회장만 아무 말이 없었다. 순간 나는 '이 회장이 지배인과의 싸움을 알고 계시구나'라고 생각했다. 라운드를 끝내고 배웅할 때도 이 회장은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그날 밤 서울 장충동에 있는 이 회장 댁을 찾아갔다. "안방에 계신데 지금은 안 보고 싶어하신다"는 말만 들었다. 딸들이 "오늘은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다. 아버님께서 사내 폭력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전통을 지키시려고 한다"고 얘기해 줬다.

나는 이 회장이 있는 서재 쪽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제 말 한번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회장님 믿고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고심 끝에 나는 1주일 뒤 회사에 사표를 냈다. 안양CC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보름 뒤 사표가 수리됐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71년에 나는 이 회장을 다시 만났다. 그때 나는 아시아 서킷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 회장의 큰아들인 이맹희 당시 삼성 부사장이 전화를 해 "한 프로, 잘 지내고 있소? 한번 봅시다"라고 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라고 묻자 이 부사장은 "회사로 나오라"고 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지금은 삼성 본사가 서울 태평로 큰 길가에 있지만 당시에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건너편에 있었고, 그 옆이 미국대사관이었다. 사무실로 찾아가니 이 부사장은 대뜸 "한 프로, 회장님이 자리에 계시니 인사드려야지"라고 했다.

이 회장은 나를 보자마자 "니 잘하고 있나. 어떻게 지냈나. 내가 널 좋아하고 사랑했는데 너와 헤어져 마음이 편치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생활은 어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가 "회장님 건강 좋으세요? 골프는 잘 되시고요?"라고 하니 "그래. 니 골프 더 잘해야 한다"고 격려해줬다. 이 회장은 사무실을 나오는 내게 100만원을 직접 건네 주었다. 당시 집 한 채 값이 50만~60만원 정도였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안양CC를 그만둔 나는 호주머니를 털어 아시아 서킷에 나가야 했는데 뜻밖에 경비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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