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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선비보다 더 선비다웠던 조선의 어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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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사친(思親)
김만중 외 지음, 전송열 엮음·옮김
서해문집, 312쪽, 1만1900원

그들은 요즘 말로 '알파걸 (α-girl)'이었다. 살림.육아.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초인'의 힘을 발휘했다. 소위, '원더우먼'이요 '수퍼우먼'이다. 어른을 공경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고, 남편을 보필하는 데 진력했으며, 자녀를 올곧은 인간으로 키우는 데 밤낮을 잊었다.

바로 조선시대 선비의 어머니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머니란 단어는 사랑과 헌신의 동의어로 통하지만 조선시대 양반집 어머니는 한 가지를 더 갖췄다. 가문의 일꾼이요, 전통의 수호자였다. 집안이 쇠락해도 기품을 잃지 않았고, 자녀가 성공해도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책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행장(行狀)'을 묶은 것이다. 수천 편이 전해오는 행장은 대부분 사대부 남성을 기린 것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행장도 30편가량 남아있다. 여기서 14편의 글을 골라 엮었는데 저마다 사연이 각별하다.

"고아와 홀아비와 과부와 노인처럼 의지할 데 없는 자가 오면 불쌍히 여겨 당신의 일처럼 걱정하셨다"(이조판서를 지낸 이현일의 어머니 안동 장씨 부인), "늘 무명옷에 푸른 치마를 입으셨고, 여러 해가 지나도 바꾸지 않으셨다"(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조지겸의 어머니 덕수 이씨 부인), "집안이 어려워도 낙담해서는 안 되며 공부를 그만두어도 안 된고 하셨다"('구운몽'을 쓴 김만중의 어머니 해평 윤씨 부인), "성년이 된 뒤에도 여러 날 책을 덮고 지내면 회초리로 때리셨다"(순안 현령을 지낸 김주신의 어머니 풍양 조씨 부인).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 바치는, 또 문장을 먹고 살았던 선비들의 글이라 다소 과장과 미화가 끼어들었겠지만 책에 나타난 옛 어머니들의 기상과 절제는 상상 이상이다. 남녀유별이 철저했던, 여성의 능력이 봉쇄됐던 시대에 한 어머니로서,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켜나가려는 모습이 지금 봐도 전혀 낡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잘 모르고 지냈던 여성 관련 행장을 찾아내, 이를 반듯한 요즘 말로 옮겼으니 일종의 '역사 공백'을 메운 의미도 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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