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前 비비안 사장 김종헌·이형숙씨 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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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0년간 일에 파묻혀 산 월급쟁이였다. 자녀의 입학식.졸업식에 얼굴 한번 내밀지 못했고, 가족 휴가는 그저 꿈이었다. 업무상 저녁에 술자리가 있었어도 다음날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책을 봤다. 학구열 덕분에 영어.일어.중국어.독일어가 능통했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고서(古書) 읽기와 서예를 즐겼다. 여러 차례 회사에서 가불해 가격이 1천만원이 넘는 귀한 고서를 샀다. 국내 대표적인 속옷 제조업체인 비비안(현재 남영L&F)의 사장을 지낸 김종헌(金鍾憲.57)씨가 바로 그다.

#2. 소녀 시절부터 산을 좋아했다. 산에 갈 때마다 매번 다른 표정으로 반겨주는 산이 친구 같았다. 특히 겨울산에선 만난 눈꽃(雪花)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일터로 나간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3무(無)'를 철칙으로 삼았다. 바가지 긁지 않기, 옷 사달라고 조르지 않기, 그리고 "왜 늦게 왔어요?" "일찍 들어오세요"라는 말 하지 않기가 바로 그것. 한편으론 평생 요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국의 맛 연구회' 이사인 이형숙(李亨淑.52)씨 얘기다.

김종헌.이형숙씨 부부의 '제2막 인생'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들은 지난 8월 중순 강원도 홍천에 편안하게 책을 보고, 빵도 먹을 수 있는 북(Book).베이커리(Bakery) 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마음의 평화.(www.peaceofmind.co.kr))'를 열었다. 金씨는 카페의 명의를 부인 이름으로 했다. "제과.제빵 기술을 가진 아내가 '깽판치면' 안 되기 때문이죠. 하하."

억대 연봉을 마다하고 심심산골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한 지 4개월. 金씨는 가게 청소.차 서빙뿐만 아니라 직접 나무를 구해 장작 패는 일에 익숙해졌다. 손님들을 인근 공작산으로 안내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궂은 일을 직접 하다 보니 볼록했던 배가 홀쭉해졌다.

부인 李씨도 북카페의 주방에서 하얀 조리복을 입고 빵을 굽는 게 너무 행복하단다. 그는 매주 월요일 카페에서 요리 강좌를 열어 자신의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살아 보니까 대만족입니다. 산골에 들어앉으니 폼 잡을 일 없어 좋네요. 요즘 마을 사람들이 나한테 이장 하라고 해요. (착용한 털신을 보여주며)내가 벌써 홍천 촌놈 다 됐죠? 도시적 삶에 지친 사람들이 찾아와 정신의 양식인 책을 보고, 육체의 양식인 빵과 허브차를 즐겨 마음의 평화를 얻었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입니다."(金씨)

金씨가 북카페를 열겠다고 생각한 것은 남영 L&F의 전신인 남영산업의 독일 뒤셀도르프 지사장으로 근무했던 1980년대 초반. "중세 시대 성(城)을 개조해 만든 호텔의 서재에 마련된 카페가 너무 멋지더라고요. 2000년 9월 회사를 떠날 때 사직서에 '북카페를 하기 위해 사직합니다'라고 적었어요. 시골에서 직접 카페 홈페이지를 운영하기 위해 지난해 전산학원에서 홈페이지 제작.관리법 등을 익혔어요."

부인 李씨는 남편이 전원생활을 결심했을 때 "그만큼 일했으면 쉬어도 돼요. 이제 제가 먹여 살릴게요. 제가 기술이 있는 데 뭐가 두려워요"라며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고 한다. 李씨는 80년대에 독일의 유명 빵집에서 도제식으로 3년간 기술을 익혔고, 미국에서 제빵전문학교도 졸업했다. 90년대 후반 배화여대.서울산업대 등에서 전통조리.식품공학을 공부했다. 2001년 11월 세계 빵.과자전시회에서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남편의 장점으로 '공(公)'과 '사(私)'가 분명한 점을 들었다. "독일에서 근무할 때였죠. 저는 한푼도 받지 않고 남편 회사의 일을 도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사무실에 있는 종이로 개인 편지를 쓴 적이 있어요. 남편이 '왜 회사 물건을 개인 용도로 쓰느냐'며 무척 화를 냈어요. 어찌나 속상했던지 그 편지를 부치지 못했어요."

이들은 내년 8월 결혼 30주년에 맞춰 두가지를 준비 중이다. 첫째는 북카페 인근에 서예기념관을 짓는 것. 金씨는 현재 '삼강행실도''부모은중경' 등 1천권의 고서와 서예집.화집 1천권을 갖고 있다. 그는 한국고서연구회 총무이사 및 부회장을 지냈다. 둘째는 부부가 알콩달콩 살아 온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는 것이다. 책의 제목은 일단 '결혼했다 방심말고 오는 연적(戀敵) 막아내자'로 정해 놨다고 한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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