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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회장 위기 관리法’이 국내 교과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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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19면

이른바 재벌 2세인 A씨는 평소 ‘카메라폰 공포증’을 호소한다. 그는 “어디를 가나 사방에 카메라가 달린 휴대전화이니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고 말한다. “친구하고 허리띠를 풀고 어디서 술 한잔이나 마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칫 풀어진 모습을 보였다간 기업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처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김승연 회장 구속 충격 … 기업들 ‘오너 리스크’로 떤다

최근 ‘오너 리스크’가 재계의 화두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아들과 관련한 ‘보복 폭행’ 혐의로 끝내 구속되자 대기업들은 “남의 일이 아니다”며 대책 마련에 나섰다. 구설에라도 한 번 오르내리면 오너는 둘째치고라도 기업에 엄청난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한화그룹이 이번 사건으로 입은 손실만 봐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그룹 측이 올 초부터 기업 통합이미지(CI) 작업에 쓴 돈은 광고비 등을 포함해 500억원 안팎이다. 트라이서클이라는 ‘뉴(New) 한화’의 이미지를 심기 위한 전사적인 노력이 뒤따랐다. 하지만 이번 일로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 또 사건이 불거진 직후 한화그룹 계열사 주가가 일제히 하락해 불과 며칠 새 시가총액으로 2000억원 이상이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장기적인 이미지 복구에 드는 비용은 추산하기도 어렵다. 재무ㆍ투자 리스크만큼이나 오너 리스크도 관리해야 할 현실적인 필요성이 생겼다는 의미다.

한 대기업의 홍보담당자는 최근 사장으로부터 “한화그룹의 대응 케이스를 잘 연구해보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는 “한국적 경영상황에서는 오너와 기업을 분리하기 힘들다”며 “오너 개인의 문제가 기업에 그대로 직결되는 구조라 어떤 식으로든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순전히 오너 개인의 사생활 문제가 기업에 심각한 손실을 끼친 사실상 첫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또다른 대기업 관계자도 “김 회장 사건이 표면화되기 이전부터 각 단계별로 한화가 어떻게 대처했고, 그 결과 어떤 사회적 반응이 나타났는지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우리 회사의 오너는 외부 교류도 잦고, 술도 즐기는 편”이라며 “돌발 사건이 터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한 기업 홍보 담당자는 “요즘 임직원이 가장 선호하는 오너는 ‘은둔형 CEO’라는 농담까지 있다”며 이번 사건을 보는 업계의 분위기를 전했다.

대기업의 오너 관리에는 보통 ‘양지 부서’와 ‘음지 부서’가 있다. 공적 활동인 ‘양지’를 맡는 대표적인 곳이 홍보부서라면, 사생활인 ‘음지’는 비서ㆍ경호 담당 부서가 맡는다. 하지만 오너의 사생활까지 완벽하게 관리하기란 쉽지 않다. 한 관계자는 “우리 회장은 개인적인 용무에는 비서가 따라붙는 것조차 싫어해 ‘관리’ 자체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김 회장의 사례에서 보듯 오너 리스크는 일단 터지면 수습도 쉽지 않다. 전문경영인이라면 신속히 경질해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오너는 속수무책이다. 회장 본인의 카리스마가 너무 강해 올바른 해결 방향을 제시하기도 힘들다. 이 때문에 위기 대처에도 문제가 생긴다. 김 회장 사건에서도 이런 구조적인 결함이 드러났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김 회장 사건의 경우 처음부터 여론을 담당하는 홍보부서에서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받았는지, 비서ㆍ법무 파트에서는 여론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화 관계자는 “일부의 시각일 뿐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룹 내 부서 간 문제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대기업 오너가 주목거리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총수 본인뿐 아니라 가족의 사생활을 둘러싼 각종 소문이 흘러다녔다. 다만 변한 것은 오너를 둘러싼 환경이다. 네트워크 발달로 사회는 갈수록 투명해지고 있다. 또 기업과 행정ㆍ사법 기관과의 밀착관계도 거의 사라졌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 불거졌을 때 적당한 선에서 무마하고 넘어가기는 힘들어졌다. 한 경영컨설턴트는 “술집 종업원들이 대기업 총수에 맞서 기자회견까지 연 것이 인상적이었다”며 “10년 전이라면 이런 일들이 과연 가능했을까”라고 반문했다.

다른 대기업들이 김 회장 사건을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대가 변했는데 기업의 대응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 현상’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은 초창기 ‘사업(business) 리스크’만 감당하면 됐다. 즉 장사만 잘하면 다른 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 이후 환경문제 등 ‘사회적(social) 리스크’가 불거졌다. 1991년 OB맥주가 페놀 사태로 타격을 받았던 게 결정적 계기였다. 기업마다 사회공헌ㆍ친환경 등의 이미지를 만들고 CI에 막대한 비용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김 회장 사건을 계기로 우리 기업도 본격적인 ‘오너 리스크’ ‘윤리(moral) 리스크’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는 기업의 윤리뿐 아니라 최고경영자의 윤리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사회적 리스크가 기업 이미지를 중시하는 CI 전성시대를 낳았다면, 오너 리스크나 윤리 리스크는 최고경영자의 개인 이미지를 관리하는 PI(President Identity) 시대를 열었다. PI는 최고경영자 한 개인을 면밀히 분석해 장점은 부각하고 단점을 개선해 기업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활동이다.

대기업들은 오너 리스크를 잘 관리한 모델기업으로 SK그룹을 꼽는다. 최 회장은 분식회계 사태, 경영권 공방 등으로 위기를 겪을 때마다 기업은 물론 자신의 이미지까지 적절히 변화시키며 분위기를 반전시켜 왔다. <그래픽 참조>

보통 대기업 오너 경영자는 입사부터 경영권 승계 때까지 조직적인 관리를 받는다. 대외활동의 반경을 넓혀나가면서 ▶공장ㆍ매장 준공식 참석으로 데뷔 ▶인수합병 프로젝트 등에 참여해 경영능력 과시 ▶언론 인터뷰 ▶경제단체 모임에 참석해 책임 있는 기업인 이미지 구축 ▶대통령 해외순방 동행 등으로 지도자 이미지를 확대하는 게 ‘정석 코스’다.

하지만 이런 관리도 리스크를 낮추는 효과만 있을 뿐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김회장 사건처럼 예상치 못한 사생활 문제가 터져나오면 그간 쌓았던 이미지의 진실성까지 의심받게 마련이다. ‘사람과 이미지’의 배정국 대표는 “PI라면 CEO의 외모와 복장 등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회와 소통하는 방식”이라며 “ 그러자면 경영인으로서나 인간적으로나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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