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전날 비극…“잔치 못해드려 한”/에이즈자살극 노부부 장남 통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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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안아주고 싶은 손자들 그냥 보고만 계시더니…/혼자만 알고 가족에게 말도 못하고 고통/돌아가신뒤 동생들 충격 못벗어나 방황
수혈 잘못으로 에이즈에 감염,부인과 함께 동반자살을 기도했다가 이때 자신으로부터 에이즈에 감염된 부인의 자살을 도운 정모씨(61)의 장남(37)은 3일 밤 시내 한 레스토랑에서 기자들을 만나 에이즈환자의 가족으로서 그동안 겪어온 고통과 현재의 참담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다음은 그 요지.
부모님이 20세기의 흑사병이라는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난 지난해 7월이후 1년여동안 받아온 심적 고통은 결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동안 동생 2명외의 가족이나 친척들에게는 아버지가 간경화에 의한 합병증으로 치료가 불가능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으로 속여왔다.
부모님들이 귀여운 손자들의 볼에 입맞춤 한번 하지 못하고 손자들의 재롱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만 계실때는 자식된 도리로서 죽고만 싶었다. 사정을 모르는 며느리들이 『손자들 한번 안아주시지 않는 어머님이 정말 너무하다』며 섭섭할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타이르면서도 속으로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삼킨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후 뒤늦게 사실을 알게된 며느리들은 『어머니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통곡했고 친지들도 『세상을 그토록 착하게 살던 분이 어떻게 그런 천형을 받을 수가…』라며 울먹였다.
한 동생은 충격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최근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고,또다른 동생은 2월 대학졸업후 취직도 하지 못한채 방황하고 있다.
나도 1년전부터 이유없이 가슴이 뛰고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이루는 심한 신경쇠약증세로 신경외과에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아버지의 치료를 담당했던 연대세브란스병원측이 성관계나 수혈을 통하지 않고는 전염이 되지 않으니 퇴원후 통원치료를 받을 것을 권유하고 속모르는 친척들도 시한부 인생이라면 집에서 편안히 여생을 마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입원치료를 받으시게 했다.
동반자살 기도후 부모님이 또다시 자살을 생각하실까봐 동생들과 함께 세명이 교대로 저녁시간부터 이튿날 오전 8시까지 부모님곁을 떠나지 않고 감시했다.
아버지가 수혈 잘못으로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이 밝혀진후 병원측에서 보상금 3천만원의 지급을 제의해 왔지만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보상받을 수도 없는 것이며 부모의 생명을 바꿔 돈을 벌고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자살을 도왔지만 당시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법적으로는 아버지의 행동이 죄가 될지 모르나 자식된 입장에서 아버지는 무죄라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의 심장판막증 수술날짜가 환갑 다음날이었고 어머니가 환갑전에 돌아가시게 돼 한분도 환갑잔치를 못해 드린 것이 가장 가슴이 아프다.<이훈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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