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동양의 나라들이 근대화를 주도했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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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쌀과 소금의 시대 1, 2
원제:The Years of Rice and Salt
킴 스탠리 로빈슨 지음, 박종윤 옮김, 열림원
각 704쪽·676쪽, 각 1만4500원

세계 근대사를 '서세동점(西勢東漸)'이란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억지일까. 엄청난 자원을 보유한 동양은 서양에겐 보물창고였다. 포탄과 총칼을 앞세운 이양선 앞에서 동양은 자원을 내놓고, 서양문물을 단체 백신 맞듯 받아들여야 했다. 서구는 문명이고, 동양은 미개하다는 인식이 근대를 잠식했다. 뒤늦게 동양은 종교.사상 등의 문화는 물론 엄청난 성장 잠재력을 가진 시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세계사가 뒤바뀌었다면 어땠을까. 서양이 아닌 동양이 세계를 좌우했다면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됐을까.

소설은 14세기 중반 유럽에서 창궐했던 페스트로 인구의 3분의 1이 아닌 99%가 목숨을 잃었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덕분에 중국.인도.이슬람 등 동양의 강국은 부전승으로 세계 정복전 본선에 진출한다.

'만약에'라는 가정 아래에서 써내려간 소설이지만 상당 부분 실제 역사를 살렸다. 정화의 보물선단이 남해원정을 나서던 영락제 치세하의 중국, 티무르가 건설한 '동방의 로마' 사마르칸트, 만력제(명나라 13대 황제) 때 일본의 히데요시가 중국 정벌의 야욕을 품고 조선을 침공한 일 등이 그렇다.

살짝 비튼 역사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일본 정벌을 위해 출항한 중국 선단은 표류 끝에 해양대륙 잉저우(아메리카)를 발견한다. 이방인들이 옮긴 질병 때문에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는다는 설정은 침입자만 바뀌었을 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겪었던 일과 닮았다. 유럽을 풍미했던 연금술은 사마르칸트에서 꽃을 피운다. 이는 '무거운 물체가 더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는 낙하 실험, 공기가 없으면 소리를 전달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진공 실험, 소리의 속도를 측정하는 실험 등의 '과학 혁명'으로 이어진다. 과학이 화학폭탄 같은 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쪽으로 쓰여 전쟁을 가속화하는 건 동양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동양 3강은 70년에 걸친 '긴 전쟁'을 치른다. 주인이 바뀌어도 세상은 별다를 게 없는 셈이다.

티무르 제국 시절부터 중국 문화혁명을 빼닮은 '신화(新華) 운동'이 벌어지는 제10부까지, 소설은 700여 년에 달하는 세계사를 재구성한다. 백수(白壽)를 다해도 일곱 번은 더 살아야하는 세월을 이야기하는 장치로 작가는 '환생'을 이용했다. 주인공들에겐 환생할 때마다 머리글자 K.B.I로 시작되는 이름이 붙는다. K는 공격적인 리더, B는 종교적인 인물, I는 과학자나 지식인으로 태어난다. 흑인 노예에 과부, 무슬림 여인 등 정통 역사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이들이 여기서는 주인공이다. 동양권의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물품이지만 평소엔 빛나지는 않는 '쌀과 소금'처럼, 소설은 갑남을녀의 일상사가 곧 역사임을 말하는 듯하다.

휴고상.네블러상 등 각종 SF문학상을 석권한 작품 '화성 3부작'을 쓰는 등 SF계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지은이의 방대한 지식과 재치는 곳곳에서 빛난다. '반야심경' 등의 불교 경전, 무슬림 경전 '쿠란' 등이 수시로 인용된다. 1권 각 장의 끝과 시작 부분에서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다음 장을 보면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방식은 '서유기'를 패러디한 것이다. 당연히 역사.문화.과학 지식이 많을수록 소설 읽는 재미가 더할 듯하다. 동양의 텍스트와 문화를 서양인의 시각으로 번역한 걸 우리 언어로 재번역해 받아들이는 것이라 친숙하면서도 다소 생경한 감이 있다. 그래도 이만한 '대체 역사소설(alternate history novel)'을 만날 기회가 흔치 않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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