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칼럼

'국화와 칼' 그리고 군 위안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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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 발언은 간접화법이다. 일본도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불가피했었다는 변명이자, 위안부 문제로부터 '동원 혐의'를 제거하려는 화술이다.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건립할 정도로 진정성을 보이는 독일과는 달리, 왜 일본은 전쟁 책임과 관련된 모든 쟁점에서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로 전도시키고 생존한 위안부들의 참혹한 증언이 잇따른 상황에서도 이 간접화법을 고집하고 있을까? 역사에서 사람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으랴만, 동원의 강제성을 입증할 역사적 문건을 내놔 보라고 강변하는 모습은 당혹스럽다.

일본 이해의 고전인 루스 베니딕트의 '국화와 칼'(1946)은 우리의 당혹스러움을 조금은 달래 준다. 항복 일주일 전만 해도 죽창을 들고 결사항전을 외치던 일본군이 천황의 패전 방송을 듣자 미군을 열렬히 환영하는 인파로 돌변한 상황을 세기의 인류학자는 '명예'로 풀어낸다. 세계에서 일본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전쟁이 실패하자, 천황의 침통한 목소리와 함께 '패전국의 명예회복'으로 그들의 목표를 재빨리 바꾼 것이다. 일본의 국민적 심성을 면밀히 관찰한 베니딕트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의 영원불변의 목표는 명예다.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은 그때의 사정에 따라 취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도구들일 뿐이다." 그래서 심미의 상징인 '국화'와 폭력의 상징인 '칼'이 역사적 국면마다 시의적절하게 교차한다. 패전으로 인해 칼로부터 국화로 돌아설 것을 강요당하자 가해의 기억이 저절로 지워졌던 것이다. 아니, 가해자의 관점을 버려야 했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는 명예회복을 방해하는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희생자들의 온갖 증언이 쏟아져도 내가 한 짓이 '아닌' 것으로 일관해 온 심리적 배경이다.

명예회복을 향한 이 태도 표변의 현상은 논리적 모순을 내포한다. 심리방정식의 양변이 다르기 때문인데 '그 어디에도 없다'는 역사적 문건을 찾아내 방정식의 양변을 흔드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푸는 가장 위력적인 열쇠다. 일본의 기억상실증이 의도적임을 환기시키는 데에 이것만큼 확실한 전략은 없다. 그런데 얼마 전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일본군 성노예제'를 펴내기도 했던 서울대 정진성 교수가 네덜란드 국립기록물보존소에서 일본군에 의한 강제동원 사실을 입증할 공식 문건을 찾아내 국내에 알린 것이다(네덜란드 정보장교 헤이브룩 대위 작성, 비밀문서 원본 #5309). 그러나 국내 언론은 싱겁다는 듯이 반응했다. 그 문건의 발견이 과연 '최초인가'에 초점이 맞춰졌고, 6년 전 번역된 어떤 책에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이유로 '흥분한 연구자'의 해프닝으로 취급했다. 며칠 후 관련문서 몇 점을 새로 발굴했다는 일본학자의 보고를 대서특필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작성자의 서명이나 문서 번호도 없는 필사본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는 동안 아베 총리는 부시 대통령과 미국의원들에게 간접화법의 변명을 하고 있었다.

'국화와 칼'이 일본의 국민 심성을 집약하는 코드라면, 한국인의 집단심은 '난초와 붓'이다. 심미성(국화)과 잔혹함(칼)의 상반된 가치관은 일본말로 하지(恥.치욕) 혐오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부등가 방정식은 치욕 회피를 위해서라면 현란한 색채와 태도 돌변의 방식을 동원한다. 반면 한국적 심성의 요체는 무채색과 투명성이다. 난초는 무채색에 가장 가까운 꽃이며, 폭력보다 정신세계의 일관성을 추구했다. 양자는 언제나 등가(等價)였다. 그런데 붓의 정신을 대변하는 언론이 일본의 집단심리를 꿰뚫어 보기는커녕 일본발 뉴스와 얘깃거리에 더 정신을 파는 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주도권을 행사하기는 요원하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