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강요 3000만원… 서울고법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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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 2004년 4월 초 온라인게임 개발 업체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J씨(당시 26세.여)는 출근 첫날부터 '술 고문'을 당했다. 소속 부서인 마케팅팀 직원 10명이 참석한 입사 환영식에서 부서장인 최모(38)씨가 J씨에게 "술을 안 먹으면 남자 직원과 키스를 시키겠다"며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한 것이다. "위가 좋지 않아 술을 마시지 못하며, 술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다"고 하소연했지만 막무가내였다.

#2. 같은 해 5월 중순 오후 11시쯤 서울 강남의 한 주점에서 열린 부서 회식 자리에서 J씨는 봉변을 당했다. 생리통까지 있어 자기 술에 물을 탄 것이 화근이었다.

최씨는 J씨에게 다가와 "아픈 건 네 사정"이라며 야단을 친 뒤 강제로 술을 마시게 했다. 최씨는 이어 J씨 등 4명의 여직원에게 테이블 아래 설치된 원형 수조에 발을 담글 것을 요구했다. 스타킹을 신고 있던 J씨가 이를 거절하자 최씨는 그녀의 다리를 잡은 뒤 강제로 수조에 집어넣었다. 최씨는 여직원들을 자신의 옆자리에 앉힌 뒤 허리를 감싸거나 어깨를 주무르기도 했다.

J씨는 두 달 뒤 장 출혈 증세를 보여 병원 치료를 받게 되자 회사와 여성부에 진정서를 냈다. 다른 직원들도 "최씨가 '술자리에 가지 않으면 인사상 불이익을 주겠다'며 강제로 술을 마시게 했다"고 진술했다.

최씨가 1주일에 두 차례 이상 회의나 부서 간 단합 등의 명분으로 회식을 주재했고, 술자리는 보통 다음날 새벽 3, 4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최씨는 "단합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씨는 인사조치됐고, J씨에 대한 성추행 혐의까지 인정돼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또 손해배상 청구소송까지 당했다.

◆ "잘못된 음주문화는 불법 행위"=서울고법 민사26부(재판장 강영호 부장판사)는 "음주를 강요당해 정신.신체적 피해를 입었다"며 J씨가 최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30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음주를 강요하는 것은 인격적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며, 상대방이 정신적 고통을 느꼈다면 불법 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부서 책임자는 사원의 인격적 자율성이 침해되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정할 업무상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판결 직후 보도자료를 내고 "직장 내 회식자리에서의 음주 강요나 근무시간 이후에 술자리를 마련해 일찍 귀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불법행위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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