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성모상 수난사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16일 오전 전화로 들려오는 원로 조각가 최종태(71.서울대 명예교수)씨의 목소리는 무척 떨렸다. 그가 서울 대치2동 성당에 세운 3m 높이의 성모상이 지난 일요일 새벽 검은색.붉은색 매직으로 온통 '낙서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해 충격을 받은 듯했다.

崔씨는 이날 비슷한 수난을 겪었던 강남 일대 성당 10여곳에 대한 답사를 시작했다.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려는 목적에서다. 하지만 그는 낭떠러지에 떨어진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가 정성을 다해 만든 조각품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정말 난감합니다. 예술품을 이토록 손상하다니…." 崔씨는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성모상.천사상 등의 피해를 본 많은 성당에서 교회 내부 일이 외부에 알려질 것을 걱정해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고, 또 막상 범인을 체포한다 하더라도 일단 손상된 예술품은 원상복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 입장에서 작품 관리를 소홀히 한 교회에 책임을 물을 수 있으나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이다.

"이번 사건을 종교 간 갈등으로 몰아가선 곤란합니다. 또 특정 광신도 집단의 정신나간 짓으로 돌려서도 안되죠. 핵심은 예술품을 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종교를 앞세워 문화를 죽인다면 우리가 후손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노(老)작가는 핵심을 찔렀다. 문화보다 이념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경직된 사고를 질타했다. 억불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의 불교 문화재 파손이나, 종종 사회 문제가 됐던 단군상 훼손이나, 이번 성모상 수난 사건이나 그 뿌리는 같은 것이다.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 문화를 문화로서 대접하지 않는 근시안을 고치지 않는 한 제2, 제3의 성모상 파손이 일어날 수 있다.

후세 역사가들은 '21세기 문화강국'을 주창하는 현재를 '문화 궁핍기'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석굴암.팔만대장경 등 과거 유물로만 문화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되새길 때다.

박정호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