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시 퇴조… 전통시 식상…|시인들 「선시」에 눈돌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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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시는 선객에게 비단꽃을 덮어주었고, 선은 시인한테 좋은 칼을 다듬어주었다.』 시와 선의 관계를 두고 중국시인 원호문이 한 말이다. 선적인 시들이 부쩍 늘어나며 꽉짜여 지첬거나 너무나도 가벼운 90년대 삶을 위무, 고양시키고 있다.
80년대 기존 서정시의 문법을 깨뜨리며 진보적 실험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이성복·황지우·최승호씨등이 이제 그들의 시에 선을 끌어들이고 있는가하면, 자연과 인생의 깊이를 노래하던 전통적 서정시인 오세영·조정권씨등도 선을 빌려 그들의 시세계에 깊이를 더하고있다.
그런가하면 민중시인 고은·김지하씨등도 선적인 깨달음을 시로써 민중과 함께 하고있다.
선적인 시는 이같이 전통서정시의 고답적 부임성, 민중시의 양분법적 과격성, 실험시의 황폐한 경박성등의 위험을 주목, 이 모두를 아우를수 있는 시의 미학으로 보편화돼가고 있다.
이같은 시점에서 한국불교문학사연구회(회장 홍기삼)는 5일 오전11시 동국대동국관에서 국문학자및 문인 1백여명이 참가, 최근의 선적인 시의 경향을 진단하고 그 흐름을 바로잡기위한 대규모 학술회의를 갖는다.
「현대시와 선」을 주제로한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문학평론가 홍기삼·송희복·한만수·윤재웅·박혜경씨및 시인 이형기·최정렬씨등이 기조와 주제발표를 맡으며 최동호·박상천씨등이 토론에 임한다.
『산꼭대기에 뭐가 있다 하는가/내려오게나/삼거리 복사꽃 피어/오늘도 걷는다만은』( 「산꼭대기」중).
한만수씨는 미리 제츨한 논문 「고은론」에서 『고씨는 민중의 깨달음을 촉구하는 한 방식으로 시에 선을 끌어들였다』고 주장했다.
고씨의 선적인 시에는 「오늘도 걷는다만은」같은 유행가가사, 술집·시장골목등 삶의 현장이 그대로 들어있는데 이는 자연이 아니라 생활, 부처가 아니라 중생을 찾고 깨우치려는 의도로 민중시와 맥이 같다는게 한씨의 주장이다.
『함박꽃 가지에서/사마귀가 성교도중 암컷에게 먹히기 시작한다./머리부터./머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 쾌감!/하늘과 땅사이에 기댈 마른 풀 한가닥없이/몸뚬어리 몽땅 꺼내놓고/우주의 공간 전부가 한번 몸 부비는/저 경련!』(「풍장 30」).
윤재웅씨는 「황동규론」에서 황씨의 최근 시들에서도 위 시에서 드러나듯 『생명의 사라짐, 그 속에서 느끼는 쾌감과 경련의 우주드라마는 바로 선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삐그덕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며칠째 내 몸안에서 /나기는 나는데 어디서 나는지 볼수가 없다. /이 도시의 병을 내몸이 함께 앓는 것일까. /마음이 뒤틀리고, 금이 가며, 흔들리는, 물질적 열반』(「물질적 열반의 도시」).
박혜경씨는 「최승호론」에서 최씨의 최근 시들은 위 시에서 볼수있듯 『자기와 한몸인 중생이 병들면 자기도 병들수 밖에 없다는 대자태비의 대승적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씨는 현대문명의 볼모성을 비판하기위한 방법으로 선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편 송희복씨는 논문 「최근시단의 선시적경향」에서 90년대 들어 선적인 시가 득세하고 있는 이유를 ▲통념과 인습의 사슬에서 벗어나 청신한 감수성 개발여지▲관습적 문자주의와 리얼리즘의 독점에 대한 반발▲산업화에 기인된 물질주의와 속류·아류 민중주의에 대한 혐오▲관습적 기존질서 해체에 따른 근원적 생명력 회복등에서 찾았다.
그러나 송씨는 선의 심오한 세계에 들어서지도 못했으면서 피상적으로 흉내만 내는 「신비로운 사기시」는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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