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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그림 속을 거닐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호 17면

사소한 일에서 행복감을 느낄 때가 있다. 이를테면 주방에서 풍겨나오는 은은한 커피향을 맡을 때, 길을 가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반드시 남을 의식하는 품격 높은 취미를 가질 필요는 없다. 어떤 이는 화랑에 걸린 그림 한 점에서 희열을 느낄 터이고, 또 다른 이는 변두리 동네의 노래방에서 송대관의 ‘차표 한 장’을 구성지게 불러제치며 뿌듯해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정말 무미건조하지 않을까. 팍팍한 사람살이, 그런 작은 행복감이라도 느끼지 못한다면 모두들 질식하고 말 게다.

투어 에세이 ⑦ 리비에라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ㆍ1862∼1918). 남녀가 격정적으로 입맞춤하고 있는 ‘키스’란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이 화가는 ‘공원(The Park ·사진 위)’이란 풍경화도 남겼다. 초록ㆍ연두ㆍ진녹ㆍ연녹 등 말과 글만으로는 표현 못할 갖가지 녹색이 캔버스를 가득 수놓은 그림이다. 바쁜 일상생활에 지친 ‘현대인’은 그 숲에 들어가 지친 영혼을 쉬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2005년 어느 봄날, 키 자란 나무가 가득한 사진 한 장을 마주했을 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진 오른쪽). PGA투어를 전담 취재하는 사진기자 정진직씨가 찍은 것인데 나는 이 사진을 어디서 찍은 건지도 모르고 무조건 ‘필(feel)’이 통했다. 분위기는 달랐지만 나는 이 사진을 바라보며 클림트의 ‘공원’을 바라볼 때와 같은 안온함을 느꼈다.

“정 선배, 이 사진 나 주쇼.”

“그건 갖다 뭐 하게. 어차피 지난 사진이라 신문에도 못 실을 텐데….”

그 이후 나는 이 작품이 PGA투어 닛산 오픈이 열린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리비에라 골프장에서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됐다. 어른 키의 예닐곱 배는 족히 됨직한 유칼립투스 나무 밑에서 타이거 우즈가 샷하는 모습을 먼 거리에서 잡은 것이다.

리비에라 17번 홀(사진 아래)에 자리 잡은 이 나무는 큰 키로 골프장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 속에선 앙상한 나뭇가지지만 나는 푸름이 만발한 여름철의 그것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나무 뒤로는 빨간색 지붕을 이고 있는 그늘집이 보인다. 녹색 잔디와 빨간색 지붕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바람이 거세게 불던 4월 12일, 드디어 사진 속의 배경인 리비에라 골프장을 방문했다. 부촌으로 유명한 베벌리 힐스 인근에 자리 잡은 코스인데 1926년 개장 이후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다. 가수 딘 마틴, 배우 그레고리 펙, 디즈니 왕국을 건설한 월트 디즈니 등이 이 골프장 회원이었다. 재미교포 의사이자 이 골프장 회원인 권중규 박사의 초청을 받아 어렵사리 라운드 기회를 잡았다.

내리막 경사가 진 1번 홀(파 5ㆍ497야드). 코스 곳곳에 자리 잡은 쭉쭉 뻗은 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코스처럼 정교하게 나무를 다듬거나, 잔디를 가꾼 것도 아니다. 키 자란 나무만큼이나 코스도 시원하다. 화이트 티잉 그라운드 기준으로만도 6532야드. 백 티는 7013야드나 된다. 러프가 길다거나, 아웃 오브 바운스 구역이 많은 것도 아닌데 스코어를 줄이기가 쉽지 않다. 특히 샷 거리가 짧은 단타자들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장타자들도 방심은 금물이다.

래드(Rad)라고 자신을 소개한 캐디는 이렇게 말했다.

“리비에라가 쉬워 보이나. 타이거 우즈가 여기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페어웨이도 넓고, 워터 해저드도 없지만 리비에라는 코스 길이와 빠른 그린만으로도 골퍼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8번 홀(파 4ㆍ375야드)은 골프의 묘미를 느끼게 하는 홀이다. 코스 한복판에 입을 벌리고 있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페어웨이가 양쪽으로 나뉘어 있다. 왼쪽으로 돌아가도, 오른쪽으로 질러가도 상관없다. 오른쪽 페어웨이로 가면 짧은 거리에서 그린을 공략할 수 있지만 티샷이 정확하지 않으면 페어웨이를 지나 러프에 공이 처박힐 수 있다. 왼쪽을 선택하면 안전한 대신에 코스 길이가 길어진다.

17번 홀(파 5ㆍ512야드). 사진 속의 유칼립투스 나무는 말없이 플레이어를 반긴다. 어느새 유칼립투스 나무와 동화된 느낌이다. 사진 속의 타이거 우즈가 내 모습으로 바뀌는가 싶은 느낌도 잠시, 기나긴 코스 앞에 좌절하는 것은 섣부른 아마추어 골퍼다.

라운드를 마친 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뒤로하고 다시 한번 코스를 내려다본다. 석양빛을 받은 나뭇잎이 갖가지 색깔로 변한다. 내가 지난 것이 클림트의 숲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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