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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인간, 인류 문명이 걸어온 원형의 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호 26면

염전이 펼쳐진 캄지역 고산지대를 지나는 소금장수 마방(말무리를 이끄는 사람들). 

차마고도(茶馬古道ㆍ중국 서남부지역에서 티베트를 넘어 네팔ㆍ인도까지 이어지는 약 5000㎞의 문명 교역로. 실크로드보다 200년 앞선 것으로 평가받지만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오지) 취재의 계기가 된 것은 고서점에서 발견한 한 장의 사진이었다.
2004년 2월 중국 윈난성 리장. 동파교의 신년행사 취재를 위해 자료 수집 중이던 나의 시선이 한 고서점 벽에 붙어 있는 사진에 머물렀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리장의 고색창연한 고성,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부인 사방가의 돌길에 줄 지어 가고 있는 말들의 행렬을 찍은 사진이었다. 묵직해 보이는 자루를 두 개씩 짊어진 말의 캐러밴 행렬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아, 그거요? 차마고도를 다니는 마방들입니다. 자주 왔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안 보이네요.” ‘차마고도? 마방(말무리를 이끄는 사람들)이라?’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그 사람들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내 물음에 책방 주인은 “이제는 그 사람들 만나기 힘들지” 하며 말끝을 흐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캄으로 가야지요.”

2. 차마고도를 따라 먼길을 가는 마방이 꾸린 야영 텐트. 3.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눈빛을 지닌 캄 전사들이 벌이는 말달리기 축제. 4. 캄에서 정치 지도자이자 최고의 지식인으로 여겨지는 수행승. 

캄으로

‘캄이라고?’ ‘캄’이란 단어를 듣자 내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1989년 티베트의 수도 라싸. 당시 나는 계엄령이 발효된 그곳에 잠입해 취재를 하고 있었다. 티베트 독립을 외치며 일어난 소요사태로 라싸 시내는 전시를 방불케 했다. 현재 중국의 지도자인 후진타오가 당시 티베트 공산당서기장으로, 직접 헬멧을 쓰고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벌여 원성이 자자했다. 무장군인들이 시내 곳곳에서 거친 검문을 하고 있었고, 라싸 주변의 거대한 사원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철저하게 파괴된 그대로 방치된 채 주민의 출입이 금지돼 있었다.

그래도 라싸에는 티베트 전역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온 순례자들이 끝없이 모여들었다. 그 순례자들 중에 눈길을 확 휘어잡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우 먼 길을 걸어온 듯 해질 대로 해진 의복, 검문하는 중국 군인에 대한 반항적 태도, 상대방의 눈을 얼어붙게 만드는 섬뜩한 눈길, 머리에 묶은 붉은 실타래, 검게 그을린 피부….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강빠한즈들입니다. 싸움을 잘하고 성격이 거칠어요. 그중엔 강도도 많으니 조심하세요.” 중국어로 강빠한즈는 ‘캄파 건달’ ‘캄파 사나이’란 뜻인데 거지ㆍ악당ㆍ한량ㆍ산적 등 부정적 이미지로 많이 쓰이는 말이다. 원래 캄파는 티베트어로 ‘캄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15년 만에 차마고도 마방의 사진을 통해 ‘캄’이란 지명을 다시 접한 나는 1989년 라싸에서 캄파의 얼굴을 촬영할 때 그들의 강렬한 눈빛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차마고도와 캄을 취재해 보기로 했다. 막상 취재에 나서니 캄파들은 3등 민족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싸움이나 일삼는 건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뛰어난 문화를 지니고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차마고도의 첫 취재지는 윈난성에서 티베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차카롱(중국명 옌징)의 계곡이었다. 메콩강 상류에서 고대 제염방식 그대로 소금을 만들어 마방을 조직해 인근 산악지대에 팔러 다니는 차카롱 사람들에게 차마고도는 잊혀진 옛길이 아니라 오늘에도 생생하게 이어오는 길이다.

목숨 건 취재

그러나 이해 가을 캄파 마방의 캐러밴을 촬영하던 나는 절벽의 비좁은 길에서 무거운 소금부대를 짊어진 말에 떠밀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천만다행으로 절벽 가운데 자라난 가시나무에 걸려 생명은 건졌지만 1억원이 넘는 HD카메라가 부서져 모든 취재를 중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촬영한 필름으로 구성한 ‘티벳 소금계곡의 마지막 마방’이란 프로그램이 방송되자 ‘차마고도’는 중국 관련 정보 중에서 많은 사람이 접하는 단어가 되었다.

2006년 6월 나는 칭짱 철도의 개통식 취재를 위해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있었다. ‘현대판 차마고도’로 불리는 칭짱 철도는 중국 공산당 창건기념일인 7월 1일에 맞춰 개통하기로 되어 있었다. 주인 없는 포탈라 궁 전면에는 애드벌룬이 떠 있었고 ‘칭짱 철도 개통 경축. 당 중앙의 세세한 관심에 깊은 감사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7월 1일 오전 라싸역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장에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공안당국이 촬영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식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일반 티베트인들도 출입이 금지되었다. 비밀스러운 개통식을 벌이고 있는 4m 높이의 붉은 담장 밖에서 나는 앞으로 티베트와 캄에 닥칠 미래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라싸 중심가에서 2시간 넘도록 쉬지 않고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가운데 교외의 야영지에서 열린 마지막 차마고도 마방의 해단식을 지켜보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차마고도를 기억하리라

그동안 내가 캄에서 보고 들은 그들의 피눈물 나는 얘기, 그 구구절절한 얘기들을 앞으로도 방송 프로그램에 담아낼 수 있을까. 티베트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은 이들조차 1959년 중국의 티베트 침공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1950년의 캄 침공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온 세계가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지금 그 사실을 새삼 들추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캄이 멸망한 이래 캄의 모든 지명은 전부 중국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캄의 주민인 캄파의 이름도 과거 일제강점기 우리의 창씨개명처럼 중국식으로 바뀐 지 오래다. 가령 ‘골무드’라는 지명은 중국식으로 ‘꺼얼무’가 되었는데 이제는 누구도 ‘골무드’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제쿤도’라는 지명도 ‘옥수현’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관점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는 티베트 민족이 한결같이 장족으로 표현된다. 그 장족으로 표현되는 티베트인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티베트인으로 부르는 것보다 캄파로 불러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식민지 시대를 겪은, 남의 지배를 받아본 나라에서 출생한 사람으로서 내가 캄파들에게 가졌던 연민과 동정, 그들의 피로 얼룩진 사연을 가슴에 묻어둘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차마고도에 대한 기록만은 계속해 나갈 것이다. 차마고도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들, 캄파의 삶 속에서 차마고도가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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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우씨는 일간지 사진기자를 거쳐 독립프로덕션에서 영상물을 제작하며 '문명다큐 몽골리안 루트''신의 산, 초모랑마' '최후의 향그릴라'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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