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공단 조성-올림픽 유치 그룹 오너들이 발로 뛰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호 06면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전경련이 없었더라면 그 감동을 맛볼 수 있었을까.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생전에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88서울올림픽은 체육계의 협력을 얻고 전경련이 주도해 우리 경제인들이 유치했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얘기는 아니다”고 했다. 당초 88년 올림픽은 일본 나고야의 개최로 기울고 있었다. 개최지를 결정하기 위해 81년 가을 스페인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의 분위기는 그러했다. 서울은 세 표 정도만 얻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주영 전경련 회장이 괴력을 발휘했다. 그해 봄 정 회장은 도와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받았다. 그는 전경련 회장단의 그룹 오너들을 동원했다. 전경련에는 세계 각국과 경제협력위원회가 있었다.

전경련의 도전과 시련 #5共 정부서 정주영 회장을 밀어내려고 하자 회장단이 뭉쳐 막아내기도

한·영경제협력위원장은 정 회장, 한·프랑스경제협력위원장은 조중훈 고 한진그룹 회장 등이었다. 이들은 상대국의 경제협력위원장을 통해 그 나라 IOC 위원을 접촉했다. 또 외국과 인연이 있는 그룹 회장들도 함께 뛰었다. 동아그룹의 최원석 전 회장은 스웨덴에서 건설공사를 딴 인연으로 현지 IOC 위원을 회유했다. 여기에 들어가는 돈도 기업인들이 각자 부담했다. 올림픽을 유치했다고 해서 전경련에 득이 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국가를 위해 한 덩어리가 돼서 그렇게 일해본 것이 내 생애에 가장 기쁜 일이었다”며 “전경련 회장이 아니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울산이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공업도시로 큰 것도 전경련의 공적이다. 61년 겨울, 전경련 회장이었던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다른 기업인과 함께 외자유치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은 한국이 먼저 투자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중 한 방안으로 ‘경제개발 특구’를 제안했다. 그래야 경쟁력이 생기고 외자가 진출할 것이라는 요지였다. 이 회장은 귀국하자마자 전경련을 통해 울산공단 건설을 제의했다. 정부는 곧바로 이를 받아들여 울산공단 건설 기공식을 열었다. 62년 봄의 일이었다.

이 두 가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전경련의 존립 의의는 두 가지다. 정부의 경제발전 파트너이자 그룹 오너들의 집합체인 셈이다.

한강의 기적은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가능했다.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이었다. 정부가 비전과 전략을 짜고, 실행 자금도 조달했다. 그러나 경제현장의 최전선에 섰던 것은 기업이었다. 때로는 정부의 손발이 되고, 때로는 정부가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두뇌 역할을 했다. 물론 이때의 기업은 그룹을 뜻한다. 그룹경영은 오너의 몫이었으며 이들의 모임이 바로 전경련이다. 결국 정부가 기업의 도움을 받거나 일을 시키려면 전경련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전경련이 대한상공회의소 등 다른 경제단체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도 여기에 있다.

민간경제를 이끌고 가는 게 재벌그룹이 아니라면, 또 그룹경영을 오너가 하는 게 아니라면 전경련이나 상의나 그게 그거다. 반면 전문경영인체제가 지배적인 외국에서 전경련 같은 조직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룹 오너가 모이는 유일한 장소, 그게 바로 전경련이다. 이 때문에 정부로선 여러 차례 전경련을 좌지우지하려고 시도했다. 자기들 맘에 드는 사람을 전경련 회장에 앉히려고 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전경련은 위기를 맞았다. 77년부터 회장을 맡았던 정주영 회장을 밀어내려고 했다. 정 회장도 처음에는 버텼지만 서슬이 퍼런 전두환 정권의 출범 직후라 자신의 기업인 현대그룹마저 위험해질 수 있어 사표를 내야 했다. 그러나 그룹 오너들로 구성된 회장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 회장을 다시 선임했다. 정 회장은 이후 두 차례 더 연임해 모두 10년을 회장으로 있었다.

86년 정 회장이 스스로 사퇴 의사를 굳혔을 때도 전두환 정권은 후임 회장 선출에 관여하려 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이례적으로 후임자를 직접 지명했다. LG그룹의 구자경 전 회장이었다. 구 전 회장이 도저히 못하겠다며 거듭 고사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당신이 안 하면 정권이 선임하려 들 텐데 그렇게 되면 전경련이 무너진다”고 설득했다. 전경련으로선 정 회장 때가 전성기였다. 자신이 최고인 줄 아는 그룹 오너들과 함께 재계 현안을 처리하는 게 여간 어렵지 않은데도 정 회장은 무려 10년을 무난하게 해냈다. 삼성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그룹 회장인데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추진력과 설득력·카리스마 등이 작용했다.

전경련의 산증인인 김입삼 전 부회장은 “회장단 회의를 하며 치열하게 싸운 때도 많았다”고 했다. 말이 좋아 재계지, 하나씩 뜯어놓고 보면 이해관계가 얽힌 ‘경쟁자들’이었다. 회의에서 고성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79년에 완공된 전경련 빌딩이 단적인 예다. 무려 30억원의 공사비가 들어간 이 빌딩을 지으려면 오너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오너들은 대부분 단돈 10원이라도 절대 ‘공돈’은 안 쓰는 이른바 ‘짠돌이’였다. 그런 오너들을 정 회장은 일일이 설득해 결국 건물을 짓는 데 성공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경련 역할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정부의 파트너 역할이면 됐다. 같이 발을 맞춰주면 정부에서 얻는 것도 많았다. 정부가 기업에 줄 게 많은 시대였다. 그러나 특히 90년대 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재벌그룹들은 이제 국내시장보다 세계가 더 중요해졌다.

정부 정책이 기업 활동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그게 국가경쟁력을 저해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전경련은 점차 정부 정책의 비판자로 나서게 됐다. 전경련 회장이 된 고 최종현 SK 전 회장(93~98년)은 취임 초부터 줄기차게 ‘자유시장경제’를 외쳤다. 기업에 이중 삼중 규제로 채워진 족쇄를 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삼 정부가 밀어붙이던 경제력 집중 억제와 재벌 개혁에 대해서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쏘아붙였다. 파트너이기를 거부한 전경련을 정부가 그냥 놔둘 리가 없다. 아무리 자신이 지은 죄가 많다고 해도 부인이 이혼을 요구하면 ‘감히 네가 이혼을 요구해?’라는 식이었다. 정부도 전경련의 필요성이 확 줄었다. 오히려 ‘해체돼야 할 존재’였다. 그래서 정부는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조사 등 온갖 공권력을 동원해 SK그룹을 압박했다. 버티다 못한 최 회장은 사과했다.

이런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재계의 이익을 대변하려면 전경련은 정부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영국의 대처 총리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같은 자유시장경제의 신봉자가 정권을 잡으면 충돌은 줄어들겠지만, 그렇더라도 대립은 불가피하다. 정부와 기업의 존립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의 전경련 회장직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삼성과 현대자동차·LG 등 3대 그룹의 오너가 전경련 회장직을 고사하는 데는 이런 구조적 배경도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