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아시아공동체 美와 함께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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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26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1993년 냉전 붕괴 후 세계 정세는 유동화돼 각국, 각 지역에서 미국ㆍ소련 우위의 체계로부터 탈피해 지역과 국가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하고 자주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일어났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유동화 속에서 아시아의 동서(東西)에서 두 가지 심각한 사태가 발발해 국제 질서와 평화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라크와 북한 문제다.

냉전 이후 종래의 미국ㆍ소련ㆍ제3세력의 세 체계는 소련 체계가 붕괴하면서 다른 두 체계도 취약해졌다. 동시에 세계는 자기 아이덴티티 강조와 민족주의의 시대가 됐다. 사실상 보수주의가 세계적으로 만연하는 시대가 됐다. 그 속에서 세계적으로 보면 미국의 일극(一極)과 다른 지역의 다원적 세계 구도 경향이 현저해졌다. 특히 2001년 뉴욕 9ㆍ11 테러에 의한 대참사 이래 미국은 테러를 없애기 위해 미국적인 자유ㆍ민주, 인권, 법의 지배, 시장경제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 체계의 세계화에 대한 열정을 강화했다. 이 외교안보 정책은 일방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됐고, 이것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응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프랑스ㆍ독일ㆍ러시아 3국이 그에 대해 반드시 동조하지는 않아 이란에 대한 정책 등에서도 낙차가 커지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지역적 결속이 현저한 움직임을 보여 동유럽ㆍ걸프ㆍ남아시아ㆍ동아시아ㆍ남미 등에서 그 결속과 독자성의 주장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지난해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회를 지배하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그때까지 주도력을 가졌던 행정부 내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을 물러나게 하고, 일방주의적 방향에서 국제 협조주의 쪽으로 돌아섰다. 이란ㆍ시리아ㆍ북한과의 대화에 나서 세계 정세는 약간의 변동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 13억 인구를 갖고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이루고 있는 중국의 부상이다.

동아시아 지역협력기구 필요

최근 세계적 신질서 형성의 파도를 타고 동아시아에서는 두 개의 지역기구 구상이 생겨나 구성국 간에 진지한 연구와 논쟁이 펼쳐지고 있다. 하나는 동아시아공동체(EAC) 창설 구상이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10개국+동북아의 한ㆍ중ㆍ일 3개국이 참여하는 기구다. 다른 하나는 이 13개국에 호주ㆍ뉴질랜드ㆍ인도를 더한 16개국에 의한 국제협력기구 창설이다. 이런 구상들은 냉전 붕괴 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지역적 기구 결성 동향의 동아시아판이라 할 수 있다. 유럽연합(EU)처럼 구성국이 주권의 일부를 할양하는 것과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의 창설은 먼 장래 이상(理想)으로서의 가치는 있지만, 정치적 현실성은 아직 매우 박약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동아시아에는 EU처럼 기독교라는 종교적 배경이 보편적이지 않고, 각국 간의 정치체제ㆍ언어ㆍ문화ㆍ종교의 낙차가 크다.

경제적 제휴 기구의 창설을 지향하는 16개국 협력기구는 보다 가까운 장래에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경제의 탈국경화, 가치관의 공통성, 나아가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FTA)과 경제제휴협정(EPA) 성립에 대한 노력을 생각하면 그렇다. EAC는 지역적 밀착성, 전통적인 아시아적 감성의 공통성, 수많은 역사적 교류의 실적과 이미 수차례 진행돼온 아세안+한ㆍ중ㆍ일 협력회의 경험을 고려하면 16개국 경제협력기구의 발전 과정에서 점차 성숙할 것이다. 최대공약수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13개국 공동체의 결성 가능성은 커진다. 이러한 미래에 대해 공통 이념을 갖는 것은 언어와 문화를 달리하는 각 국민에게 공동의 이상을 부여한다. 각 정부가 그 공동의 이상에 자국 정책을 가급적 맞추려 노력하면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자라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럴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 미국의 존재다. 동아시아 경제협력기구나 EAC 창설에는 안전보장이 확보돼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 조약의 네트워크가 동아시아의 해저에 동력선처럼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미ㆍ일 안보조약, 한ㆍ미 상호방위조약, 미ㆍ필리핀 동맹조약, 미ㆍ대만 특수관계, 미국과 태국의 우호협력관계, 미국과 싱가포르 간 안전보장 협력관계, 미국과 호주ㆍ뉴질랜드 간 동맹조약이다. 더 중시해야 할 것은 경제관계다. 이 지역과 미국의 상호 자본투자, 금융관계, 수출입량을 생각하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는 해도 미국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아시아ㆍ태평양을 망라하는 아태경제협력체(APEC)와의 협력관계를 생각하면 APEC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미국과 특별한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미국에 16개국 경제협력기구ㆍEAC와 APEC의 조화ㆍ협력의 안정자 역할을 맡게 하는 것이 멀리 내다보는 정책이다. 이는 동아시아에서의 지역기구 설립 과정에서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이다.

한ㆍ중ㆍ일 3국 정상회담 정례화를

일본의 전 정권 때 한ㆍ중ㆍ일 3국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취임 얼마 후 중국과 한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했다. 3국 간에는 긴 교류의 역사가 있고, 각 국민 사이에는 우호ㆍ교류의 의식이 진하게 잠재하고 있다. 앞으로 일본 총리의 중요한 업무는 이 3국 정상회담을 정기화해 남쪽 아세안과의 결속에 대응하고, 북쪽 3국 정상 간에 우정과 협력을 쌓는 것이다. 이는 EAC를 성립시키는 기본적인 조건의 정비다. 일본 총리는 성의를 다해 상호 의사소통을 꾀하고 3국 정상회담을 실현해야 한다. 일본 국민도 총리의 겸허함과 적극적 외교 활동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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