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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도 스타도 그 앞에 서면 솔직해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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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10면

래리 킹(73)은 CNN의 라이브 토크쇼 ‘래리 킹 라이브’를 진행한다. 이 토크쇼는 게스트 인터뷰와 토론, 시청자 전화 통화로 구성된다. 지난주 그는 방송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방송 데뷔 50주년, 래리 킹

50년 동안 래리는 세계적 정치인, 기업인, 학자 등 4만 명을 인터뷰했다. 토니 블레어, 마거릿 대처, 빌 클린턴, 블라디미르 푸틴, 말론 브랜도, 미하일 고르바초프, 마돈나, 마틴 루터 킹 목사… 그가 누구와 인터뷰했는지는 화제가 아니다. 그가 인터뷰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다. 요한 바오로 2세, 찰스 왕세자, 피델 카스트로는 인터뷰하지 못했다.

네모난 뿔테 안경, 멜빵, 걷어올린 와이셔츠 소매. 항상 이런 모습으로 래리는 시청자 앞에 나타난다. 많은 미국인에게 ‘래리 킹 라이브’는 생활의 일부다. 일단 틀어놓고 설거지도 하고 밥도 먹는다. 그의 연봉은 700만 달러(약 70억원). 상복도 많아 TV뉴스 보도부문 에미상과 국제방송협회로부터 ‘올해의 방송인상’을 수상했다.

4월 18일 래리와 부인 숀 사우스윅이 래리의 데뷔 50주년 파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래리는 23세 연하인 7번째 부인 숀과 아들 둘을 뒀다(사진 위).4월 19일 클린턴 전 대통령이 ‘래리 킹 라이브’에 출연해 버지니아 공대 참사, 부인 힐러리의 출마 등에 대해 래리와 대화하고 있다(아래). AP 

래리는 로스앤젤레스, 뉴욕, 워싱턴 DC를 오가며 쇼를 진행한다. 그러기 위해 한 달에 1만에서 1만5000마일을 비행기로 이동한다. 백악관, 감옥, 게스트의 집 등이 임시 스튜디오가 되기도 한다. ‘래리 킹 라이브’는 세계 200개 나라에서 방영된다. 시청자는 1억5000만 명이다. (한국은 Q채널에서 매주 금요일 밤 10시에 더빙 방영)

래리의 촬영장은 정치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1992년 로스 페로는 ‘래리 킹 라이브’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페로의 출마를 그의 부인보다 시청자들이 더 빨리 알게 됐다. 이후 토크쇼에서 출마 선언을 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토크쇼 민주주의’라는 말까지 나왔다. 93년 앨 고어 부통령과 페로는 1630만 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해 찬반 토론을 벌였다. 이튿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어가 이겼다고 생각했고 결국 NAFTA는 의회에서 비준됐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래리를 ‘마이크의 거장’이라고 했다. 그는 33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자랐다. 본명은 로런스 하비 자이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래리의 어린 시절 영웅은 전설적인 방송인 아서 고드프리였다.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고, 젊은 시절 우편 배달 서비스 회사 직원을 포함해 방송일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면서도 래리의 꿈은 방송인이었다. 래리는 말한다. “다른 애들은 대학에 갔지만 나는 배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방송인이 될 거라고.”
56년 22세였던 래리는 큰 뜻을 품고 플로리다로 향했다. 마이애미 비치에 있는 작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잡역부로 취직해 청소나 심부름을 했다. 이듬해 한 아나운서가 갑자기 이직하는 바람에 래리는 주급 55달러의 디스크 자키로 데뷔한다. 본명이 어렵고 유대인 티가 난다는 방송국 부장의 지적에 따라 래리 킹으로 이름을 바꿨다.

꿈은 이뤘지만 불행이 찾아왔다. 35만2000달러나 빚을 져 파산상태가 됐고, 71년엔 중(重)절도죄로 체포돼 3년간 방송계를 떠나기도 했다. 78년 복귀한 래리는 ‘래리 킹 쇼’라는 라디오 프로를 맡아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85년 6월 CNN의 영입 제의를 받아들여 지금까지 프로를 진행하고 있다.

래리의 성공비결은 뭘까?
“래리는 독특한 인터뷰 스타일로 게스트로부터 솔직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출연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게 특기다. 인터뷰는 철저한 기획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말하다 잠시 멈추는 것까지 사전에 준비된 것이다.” 대충 이런 식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본인의 얘기는 좀 다르다. “나는 짧은 질문을 던진다. 절대로 똑똑한 체하지 않는다. 다 아는 것처럼 꾸미지 않는다. 모르는 얘기가 나오면, ‘무슨 말이죠?’라고 묻는다. 인터뷰 준비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래야 게스트가 하는 말에 집중할 수 있다.”

래리는 초청 손님이 토크쇼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메라는 방영시간의 95% 이상을 초청 손님에게 할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게스트 중 래리가 꼽는 최고는 맬컴 X, 프랭크 시내트라, 마틴 루터 킹, 그리고 제인 폰다다. 가장 난감한 게스트는 로버트 미첨(1917∼97, 가수이자 배우)이었다. 미첨은 질문에 딱 한마디만 대답하고 마는 게스트였다.

50년 방송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대니 케이(1913∼87, 배우ㆍ가수ㆍ코미디언)를 인터뷰할 때 찾아왔다. 어떤 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그 아들은 한국전쟁에 수병으로 참전해 19세에 전사했다. 미 해군이 보내준 아들의 유품에는 케이의 사진이 있었다. 아들은 케이의 열렬한 팬이었다. 이 어머니는 사진을 틀에 넣어 30년 동안 간직했다. 아들을 추모해 케이는 아들이 제일 좋아했다는 ‘예스, 데나’를 불렀고 촬영장은 울음바다가 됐다.

73세인 래리는 언제 권좌에서 내려올 것인가. 우선 래리의 나이와 건강이 문제다. 이미 87년에 심장마비로 수술을 했다. 당시까지는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피우는 골초였고 정크푸드를 먹으며 운동도 하지 않았다. 수술 후 그는 담배를 끊고, 운동을 시작했으며 식사량을 줄였다. 래리는 지난 달에도 수술을 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평도 있다. 2001년 9월에는 USA투데이에 매주 쓰던 칼럼을 중단하게 됐다. 통보내용은 이랬다. “귀하는 프랭크 시내트라에 대해 쓰곤 하는데 그는 죽은 사람 아닌가요?”

계약에 따르면 래리는 2009년까지 쇼를 진행한다. “CNN이 나를 원한다면 나는 남을 것이다. 나는 그러길 바란다. 나는 떠날 의사가 조금도 없다. 어디로 은퇴하라는 말인가?” 래리에게 중독된 사람들에겐 얼마나 든든한 말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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