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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아카데미 같은 외교관 양성 대학원 세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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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사진=변선구 기자]

한국외국어대 박철 총장은 요즘 일주일이 짧다. 평소 오후 11시가 넘어 퇴근하기 일쑤고, 일요일에 출근하기도 한다. 박 총장이 정열을 쏟고 있는 분야는 자유무역협정(FTA) 시대에 맞는 전문 인재 양성이다. 박 총장은 '서희 아카데미' 같은 전문 외교관 인재 양성 대학원을 설립해야 FTA 시대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국회에서 사립학교법과 로스쿨법 등 교육 관련 법안이 처리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는 그의 심정은 그래서 더 답답하다. 교육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 한국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굼뜨게 시간만 허비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215일간의 직원 파업 때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적용해 노조의 백기를 이끌어낸 그는'뚝심 있는 총장'으로 불린다. 일요일인 29일, 글로벌 인재 양성에 총장직을 걸었다는 그를 서울 이문동 한국외대 총장 집무실에서 만났다.

-4월 2일 한.미 FTA 체결에 이어 다음달에는 유럽연합(EU)과의 협상이 시작된다. 외교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다.

"고려 초의 공신 서희(942~998)는 거란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적장과 담판을 해 적군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새로 얻어냈다. 외교력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백성을 구해냈고, 영토도 넓혔다. 외교력이 얼마나 위대한가. 당시 나라를 구한 원동력은 유창한 외국어에 있었다. 지금도 비슷하다. 21세기 FTA 시대에도 외교 경쟁력의 밑바탕은 역시 외국어다."

-외국어만 잘한다고 경쟁력을 갖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이다. 외교관이든, 상사 주재원이든, 유학생이든 '말 잘하는 기계'가 돼서는 경쟁력이 없다. 그 나라의 언어뿐 아니라 정치.경제.문화.법.풍습 등 모든 분야를 꿰뚫어야 고급 인재가 될 수 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외교관들은 그런 소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대학에 다닐 때 머리를 싸매고 고시 공부만 해서 외교관이 된다. 심지어 주재국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도 있다. 창피한 일이다. 세계가 하나로, 또 블록으로 묶여 치열한 경쟁을 하는 마당에 잘못돼도 한참 잘못돼 가고 있다."

-중앙일보는 2007년 어젠다의 하나로 '서희 외교 아카데미를 세우자'를 제안했다. 2년 석사과정의 외교관 양성 아카데미를 개설해 전문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취지였다.

"(불끈 주먹을 쥐며) 바로 그것이다. 외교관 양성 대학원 코스를 만들어야 한다. 시대가 변했는데 구닥다리 제도에 매달려서야 되겠는가. FTA 시대를 맞아 전문 외교 인력을 키울 수 있는 전문대학원을 세워야 한다. 포도주 마시는 법 등 테이블 매너에서 깊이 있는 외교 지식까지 모두 가르쳐야 한다. 외교관들이 해외에 나가 매너가 '꽝'이라는 말을 더 이상 들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무한경쟁 시대다. 의학전문대학원이나 법학전문대학원처럼 대졸자들이 일정 기간 소양을 갖춘 뒤 시험을 치르도록 해 인재를 키워야 한다. 그게 바로 '아날로그' 교육을 '디지털' 교육으로 바꾸는 지름길이다."

-교육시장 개방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경쟁이 부담스럽다고 문을 닫아걸면 잃는 게 더 많다. 자식 공부시키려고 외국 유학을 보내고, 더 비싼 물건을 사야 하고…. 결국 돈만 더 축난다. 역사적으로 봐도 우리나라는 국제감각이 뒤떨어졌다. 세계 정세에 어두웠기 때문에 임진왜란 같은 일을 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은 16세기부터 서양을 알았는데, 우리는 내부 다툼만 하고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양을 받아들이고 제도개혁을 통해 우리를 넘보곤 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대학 교육에 이제 국경은 없다. 적극적으로 해외에 학생을 보내고 또 받아야 한다. 그게 바로 글로벌화다."

-글로벌 시대에는 어떤 인재형이 필요한가.

"조선시대에 성균관에서 인재를 길러냈듯이, 글로벌 시대에 맞는 리더는 결국 대학에서 키워야 한다. 공부벌레보다는 창의력 있고, 협동정신 있고, 리더십 마인드, 새로운 시대 적응력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다."

-그럼 대학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실적을 내지 못하면 망한다(Publish or perish)'는 절박함이 필요하다. 발전을 하려면 교수.직원.학생 모두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감내해야 한다. 건전한 의미의 '피곤'은 대학 발전을 위해 절대 필요하다.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고 현실에만 안주하면 결국 벼랑 끝에서 떨어지게 된다. 교수들이 '철밥통'이라고 하지만 옛말이 되고 있다. 한국외대의 경우 교수들의 연간 연구논문 실적 요구량을 두 배로 늘렸다. 국제학술학회에 논문을 내지 않으면 승진 기회도 없다. 대신 당근은 준다. 외국 학술대회에 참가할 경우 연간 3회까지 모든 경비를 학교에서 대준다."

-구체적인 대학의 발전 방향을 제시해 달라.

"대학은 브랜드.트렌드.디자인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 한국외대의 브랜드는 통.번역 대학원이다. 영어.일어.중국어.스페인어.프랑스어.독어.아랍어.러시아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인재는 한국외대가 만든 대표적 명품이다. 작지만 강한 브랜드가 강한 대학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저것 손대는 백화점식 대학 경영은 앞으로 설 땅이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트렌드다. 대학은 시대를 잘 읽어야 한다. 변화를 좇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기업의 변화 속도는 시속 100마일, 학교는 10마일에 불과하다고 비유했을 정도다. 디자인은 대학의 발전 계획을 의미한다. 학생을 어떻게 가르치고, 교수들을 어떻게 바꿀지를 디자인해야 한다."

-교육정책이 대학 발전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있다.

"대학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율권이 필요하다. 근데 그걸 많이 제약한다. 사립대학도 재정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풀어주면 좋겠다. 학문적인 업적도 내면서 수익사업으로 외국어교육사업에 적극 뛰어들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중국의 경우 국립대학도 30%만 국가가 지원하고 30%는 수익사업, 30%는 등록금으로 충당한다."

-정부의 3불정책(본고사.기여입학제.고교등급제 금지)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그것 역시 대학 경쟁력을 갉아먹는 것 아닌가.

"3불정책 논쟁의 핵심은 대학의 학생 선발 자율권이다. 한국외대의 경우 논술 문제에 외국어 지시문도 낼 수 없다. 이런 난센스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입시는 대학에 맡겨라. 그래야 대학이 산다."

-사립학교법과 로스쿨법이 국회에서 발목이 잡혀 있다.

"교육은 이념 싸움, 이익다툼이 돼서는 안 된다. 미래를 보는 혜안으로 합리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무엇이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는 길인가를 국회의원들이 고민해야 한다."

-한국외대는 외국어 전문 인력 양성의 산실이 돼 왔다. 하지만 국제경쟁력은 약한 것 같다.

"1954년부터 53년간 10만 명의 인력을 배출해 왔다. 대통령의 입과 귀가 돼주는 전문 통역사나 세계 각국을 누비는 외교관, 무역인 등 많은 이가 이 학교 출신이다. 처음에는 5개 국어(영어.프랑스어.독일어.중국어.러시아어)로 출발했으나 현재는 39개 언어교육 과정을 개설해 놓고 있다. 통.번역 대학원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국제 스탠더드에 맞는 대학원으로 2005년 국제통역번역대학원협회의 인증을 받았다. 세계 톱10의 외국어 전문인력 양성 대학으로 발돋움하겠다."

-그럼 어떤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가.

"우선 4월 13일 유엔평화대학(UPEACE.유피스)과 맺은 국제 전문가 양성을 위한 공동 석사과정 협정을 꼽을 수 있다. 유피스는 유엔 부설 고등교육기관으로 서울에 사무소를 연다. 미국 뉴욕과 스위스 제네바 두 곳에만 사무실이 있으므로 서울이 세 번째다. 내년 3월부터 시작하는 공동 석사과정은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에 '국제법과 인권', '미디어와 평화' 등 두 과정이 개설된다. 과정당 20명의 학생이 국내(두 학기)와 코스타리카 소재 유피스 본교(한 학기)에서 수업을 받게 된다. 공동 석사 과정을 마치면 유엔 직원 채용 자격시험에서 1차 서류전형을 면제받는다. 별도의 유피스 캠퍼스도 설립할 예정이다."

-공부를 너무 많이 시켜 학생들이 괴로워한다고 들었다.

"(손사래를 치며 웃으면서) 오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난해부터 학부생이 8학기 중 1학기는 외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7+1학제와 졸업 시 영어와 제2외국어 시험을 보게 하는 외국어 인증제를 도입했다. 반기문씨가 유엔 사무총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아서도, '빽'이 있어서도 아니다. 영어 실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총학생회가 환영할 정도로 학생 반응이 뜨겁다."

글=양영유 기자<yangyy@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박철 총장은 …

1949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를 졸업한 뒤 스페인 마드리드국립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85년부터 한국외대 서반어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6년 2월 제8대 총장에 취임했다. 부분 번역에 그쳤던 소설 돈키호테를 국내 처음으로 완역 출간(2004년)해 문학계에 화제를 불러왔다. 미국 하버드대 로망스어 학부 초빙교수, 한국서어서문학회장, 한국외국어교육학회장, 아.태지역 외국어대총장협의회장, 한.스페인우호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서희 아카데미=고려 성종 때 뛰어난 외교술로 거란의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 적군을 철수시키고 강동 6주를 새로 얻어낸 서희 같은 외교관을 양성하는 전문대학원을 말한다. 2년 석사과정으로 외교관 후보를 선발(1차 시험)해 교육하고 성적과 시험(2차)을 거쳐 일부를 외교관으로 임명하는 방안이다. 중앙일보가 외교 엘리트 양성을 위해 올 1월 정부에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