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사나이답게" 강조 '보스형 총수' 불명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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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최근 아들과 관련한 ‘보복 구타’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김승연(55) 한화그룹 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좋아한다고 한다. 한화그룹 관계자의 말이다.

“몇 년 전 연말에 김 회장님이 전 전 대통령 부부를 초청했어요. 한강에 유람선을 띄워 파티를 하는 행사였죠. 당시에도 전 전 대통령은 사회적인 비난을 많이 받아 두 사람의 관계가 외부에 알려질까봐 그룹으로서는 무척 꺼렸죠. 하지만 김 회장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초청했어요. 사나이는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그런데 전 전 대통령이 이런 초청을 받고는 전화를 다시 했어요. 자신뿐 아니라 평소 데리고 다니는 전직 장관 등 30여 명의 부부와 함께 오겠다는 연락이었어요. 관계자들이 화들짝 놀랐어요. 당시 예약된 유람선에는 그만한 인원이 더 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하는 수 없이 이리저리 뛰어 유람선을 한 척 더 빌려 행사를 겨우 치렀어요.”

회사 로고를 ‘트라이서클’로 바꾸면서 태국 방콕에서 글로벌 경영을 선포했던 1월 말의 김승연 회장. 최근 폭행사건으로 자신의 야심 찬 구상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중앙 포토

김 회장은 전 전 대통령의 ‘의리와 사나이다움’ 을 높이 산다는 얘기다. 한화그룹의 사훈에도 ‘신의’가 제일 첫머리에 나온다. 외부에서 경력직으로 채용된 한 임원은 “면접 때 ‘의리’라는 단어를 빼놓으면 떨어질 정도라고 해서 준비를 철저히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의리를 지키려다 손해도 감수하는 인물을 존경한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 국가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한때 영어(囹圄)의 몸이 됐던 로버트 김에게 10년 가까이 생활비를 지원했다.

한 번은 회사 인근 식당에 들렀다가 직원들의 외상값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 갚기도 했다. 또 2003년에는 광고계열사인 한컴의 신입사원이 50억원짜리 광고를 따내자 직접 격려 전화를 하고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2500만원의 특별포상금을 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평소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제대로 하는 사람이 되자”고 주문한다.
재계에서는 이런 그를 ‘보스형 총수’로 분류한다. 이번 ‘보복 폭행’ 사건의 전개 과정에도 이런 성향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피해 당사자인 아들의 ‘고소하자’는 제안에 김 회장은 “그러지 말고 사나이답게 직접 사과를 받아라”고 얘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대기업 총수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주변에서는 또 다른 이유로 그의 ‘유별난 부정(父情)’을 든다. 직선적인 스타일에 자식 사랑이 더해져 결국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었다는 얘기다. 이 같은 그의 ‘가족애’ 는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올해 설 직전인 2월 중순 김 회장은 그룹 인사팀에 이색 지시를 했다. 그룹 내에서 부인과 자녀를 해외로 떠나보내고 홀로 생활하는 직원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보라는 것이었다. 발단은 한 시사잡지에 난 ‘기러기 아빠’의 애환을 담은 기사였다. 기사를 읽고 애틋한 마음이 든 김 회장은 해당자 전원에게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5일간 특별휴가와 왕복 항공경비를 지원했다. 그 자신이 아들 셋을 모두 조기유학 보낸 터라 기사를 보자 동병상련의 정이 발동했다는 것이다. 장남 동관(24)씨는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현재 공군에 복무 중이며, 둘째 동원(22)씨는 예일대에 재학 중이다. 국내에서 실시된 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 이번 사건에 연루됐다는 게 그룹 측의 설명이다. 막내 동선(18)씨는 승마로 유명한 미국 태프트 스쿨에 재학 중이다.

지난해 12월 아시안게임이 열린 카타르 도하. 마장마술 경기장에 김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곧바로 단체전에 출전한 아들 동선씨에게 다가갔다. 첫 국제경기에 긴장하는 아들에게 그는 “정 떨리거든 본부석에 있는 나를 쳐다보라”며 용기를 북돋웠다.
이날 김 회장은 아들의 경기 장면을 직접 보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 부인과 함께 카타르로 갔다. 또 세 아들들의 입학식이나 졸업식이 있는 날이면 만사를 제쳐놓고 참석하곤 했다는 게 그룹 관계자의 설명이다.

사실 김 회장 자신도 일찌감치 가족과 떨어져 긴 유학생활을 했다. 경기고 재학 중이던 16세 때 미국으로 떠나 대학원 과정까지 마친 뒤에야 귀국했다. 이후 경영수업을 받던 도중이던 1981년 부친인 김종희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떴다. 김 회장의 나이 불과 29세 때였다. 이를 두고 그룹 관계자는 “자녀에 대한 유별난 애정은 어쩌면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의 보상심리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저돌적인 행보로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재계 순위 12위인 한화의 급성장에는 82년 한양화학, 2002년 대한생명ㆍ신동아화재 등을 인수합병하고 주변의 만류에도 유통ㆍ레저사업 진출을 밀어붙인 김 회장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그 결과 회장 취임 이후 26년간 한화의 자산 규모는 20배 이상 커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잡음도 많았다. 그간 검찰 수사만 세 번을 받았다. 93년에는 미국에서 호화주택을 구입한 혐의로 구속돼 57일간 옥살이를 했다. 2004년엔 불법 정치자금 제공 건으로 재판을 받았고, 2005년에는 대한생명 인수 과정의 의혹으로 다시 조사를 받았다. 여기에 이번 사건으로 ‘폭행 피의자’라는, 대기업 회장으로서는 보기 드문 불명예까지 추가하게 됐다.

올 들어 한화는 그룹 CI를 ‘트라이서클’ 로 바꾸고 글로벌 기업으로의 이미지 쇄신을 대대적으로 추진해 왔다. 변화를 주도한 것은 김 회장이었다. 그러자면 그 자신부터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그의 이름 중 ‘승’자가 기존의 ‘오를 승(昇)’에서 ‘되 승(升)’자로 바뀌어 있다. 이런 차에 ‘김회장발(發) 악재’가 터졌다. 한화맨의 시름이 깊어가는 이유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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