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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속앓이/세계가 시름시름/유대학살 무죄판결파문(지구촌화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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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프랑스인 “인종반역 아니다” 해석/나치협력 “반역사적” 맹렬한 항의
2차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여러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한 프랑스인이 지난달 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은 사법적 「이변」이 발생,지난달 내내 프랑스가 시끄러웠다.
비록 재판결과에 대한 불만이 최근 미국의 경우처럼 폭동으로 발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인종차별적」이고 「반역사적」인 판결에 항의하는 각종시위와 집회가 프랑스 각지에서 최근까지도 계속됐었다.
지난달 13일 파리고등법원은 인류반역죄로 기소돼 수감상태에 있던 폴 투비에(77)에 대해 사실상 무죄판결이나 다름없는 기소면제 판결을 내렸다.
나치점령하에서 리옹지역 친나치민병대 정보책임자로 활동했던 투비에는 당시 7명의 유대인을 살해하고 리옹지역 유대인의 나치수용소를 강제이송하는데 협조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나치독일 패망후 40여년간을 프랑스내 여러 수도원을 전전하며 숨어지내왔으나 지난 89년 프랑스의 「나치사냥꾼」으로 유명한 유대계 변호사 세르즈 클라스펠트부인에 의해 결국 덜미가 잡혀 법정에 서게 됐다.
나치점령하의 형사적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지난 71년에 제정된 사면법이 그에게도 적용되므로 프랑스내 유대계 단체 등 원고측은 인류반역죄로 그를 기소했었다.
파리고법은 판결문에서 『유대인을 살해한 그의 행위가 이념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인류반역죄를 구성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판시하면서 아울러 당시 나치에 협력했던 비시정권이 이념적 동기에서 유대인을 탄압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역사적 해석까지도 덧붙였다.
파리고법의 판결내용이 알려지자 원고측인 각 유대인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계·정치계·문화계·인권단체 등이 재판결과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법원의 판결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가 잇따랐고,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반역사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판결」이라며 재심을 요구하고 나섰다.
프랑수아 미테랑대통령은 『너무 가벼운 판결이라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라는 반응을 나타냈고,프랑스 하원은 판결에 항의해 회의를 일시 정회하기도 했다.
프랑스법원은 「리옹의 백정」으로 잘 알려진 클라우스 바르비에 대해 인류반역죄를 적용,종신형을 선고한 바 있다.
지난해말 끝내 감옥에서 사망한 바르비가 프랑스인을 학살한 독일인임에 비해 투비에는 유대인을 학살한 프랑스인이라는 점에서 프랑스법원의 이번 판결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나치점령하에서 어린 아이 1만1천명을 포함,총 7만6천명의 프랑스계 유대인들이 나치수용소로 실려가 독가스실에서 살해됐다. 그 배후에는 투비에처럼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인들의 협조가 있었다.
이번 판결은 나치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공범이기도 했던 쓰라린 역사의 한 페이지를 가급적 외면하고 싶어하는 프랑스인들의 일반적 심리의 결과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흑인이 백인을 때리면 죄가 돼도 백인이 흑인을 때리는 것은 죄가 안되는 이중적 정의에 대한 불만이 이번 미국폭동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으로 지적되듯이 투비에에 대한 판결문은 자유와 평등을 자신들의 전유물인양 내세우는 프랑스에도 이중적 정의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파리=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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