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흑인폭동이 주는 교훈/이창건(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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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금세기초 하와이의 사탕수수밭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교포들의 고생은 처참 바로 그것이었다. 해방후와 한국전쟁 직후 외국에서 몇주 또는 몇달만에야 가족소식을 전해 들으며 고학하던 선배들의 괴로움을 오늘의 세대들은 감히 되풀이할 생각도 못할만큼 눈물겨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먹고 안쓰고 안자면서 오로지 보다 나은 앞날을 위해 개미처럼 일하던 LA동포들이 흑백간의 고래싸움 틈바구니에서 희생양으로 지목되어 새우등처럼 터지고 말았다. 고생과 땀의 결실이 불타고 약탈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재성군의 죽음은 통탄할 일이다. 남달리 의협심이 강한 젊은이였기 때문에 희생된 것이다. 폭도들의 침입에 총들고 맞서는 교포들의 모습을 보고 평화유지군을 보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흑백 갈등의 희생양
앞으로 국제화가 가속되면 지구촌자체가 LA처럼 다민족 복합사회가 될 가능성이 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사건을 한국인이 지닌 장·단점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 앞으로의 진로모색에 참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높은 교육열,중동 건설현장에서 보여준 악착스러움,근면,마음만 내키면 간이라도 빼줄듯한 친근성 등은 바람직한 덕목들이다. 불탄 상점에서 10만명이 뛰쳐나와 용서와 화해의 평화시위를 벌인 것 은 한민족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드라마였다. 반면 우리는 쓸데없이 무례하게 떠들고,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리고,외국에 나가 역겹도록 거드름피우고,또한 감정억제 결핍증에 걸린 경솔함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억지를 써서라도 칭찬받으려는 추한 졸부근성도 고쳐야 할 일이다. 올바르게 살았으면 가난해도 떳떳하게 여기는 것이 중국인과 일본인의 태도인데 우리는 가난을 부끄러워하는 편이다.
우리는 민족정신의 개조를 위해 유대인의 지혜,중국인의 끈질김,일본인의 깨끗함,독일인의 합리성을 배우고,무엇보다 겸손의 덕을 익혀야 한다. 겸손은 비굴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감의 고차원적 표현이요,능력있는 자의 여유요,양보다.
국제경쟁 시대에서는 더불어 사는 지혜를 바탕으로 해 남보다 기술·품질·가격·신용·지식·도덕성에서 한차원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길들여야 한다. 그런 뜻에서 높은 위치를 선점했을땐 남에게 떡고물을 베푸는 아량을 보여야 할 것이다. 유대인의 생활지침서인 『탈무드』는 해외에 사는 사람들의 불쌍한 이웃에 대한 지원의무를 설명하고 있다. 네모꼴 만큼의 이윤을 얻으면 그중 내접하는 동그라미 만큼만 챙기고 네 모퉁이 몫은 남들에게 적선하라는 것이다. 네모꼴안에 내접하는 동그라미 넓이는 79%이니 구석진 나머지는 21%다. 공기중의 산소는 21%이고,신체의 수분함유량은 79%다. 은행간판 걸어놓으면 79명이 예금하고 21명은 대출을 희망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좋은 사람 비율은 79%고 21%는 나쁜 사람일 수 있다.
따라서 수입중 21%쯤은 지역사회에 돌려줘야 폭도의 습격을 피할 수 있고 분노의 화염병대신 존경받게 되며 평화공존이 가능하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것을 혼자서만 먹으면 소화불량에 걸린다.
○세계 다민족화 추세
남북통일후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이상국가의 모델은 여러나라의 장점들을 발췌해 단군선조의 홍익인간사상에 접목시킨 최첨단 선진국형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중립국의 장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케네디 대통령 시절,소련이 미국 안마당이나 다름없는 쿠바에 핵무기를 배치했을때 하마터면 제3차대전이 일어날뻔 한 것을 스위스의 국제적십자총재가 크렘린 당국을 설득해 일촉즉발의 핵전쟁을 예방한 일이 있다. 쟁쟁한 외국정치지도자들이 모두 실패한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신용과 정직을 생명으로 삼는 스위스인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우리연구소에 찾아온 방문객중 가장 정성들여 영접한 대상이 스웨덴 대학원학생들이었던 것은 그들이 노벨상을 주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다. IAEA가 자리한 빈에는 책방이 유달리 많은데 그것은 그들의 문화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인구당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고,우리 포항제철도 거기에서 기술을 도입했을 만큼 기술수준이 높은 나라다. 이 세나라가 영세중립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이들이 불편부당하고 능력이 있고 또한 공정하고 정직한 공업선진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남들의 장점을 체득함으로써 앞으로 신용·존경·중용·학문숭상·고부가가치산업의 발전을 토착화한 이상향의 건설을 지향해야 한다. 이 일을 하는데는 노자의 도덕경교훈이 참고가 될 것이다.
○더불어 사는 슬기를
「우리 손이 닿는 신체의 기관중 가장 딱딱한 것과 가장 부드러운 것은 이와 혀다. 이는 딱딱하고 강하기 때문에 신것이 들어오면 녹고,단것을 먹으면 썩고,썩으면 고통을 주고,시간이 흐르면 빠진다. 그러나 혀는 부드럽고 약하게 보이기 때문에 신것이 들어와도 안녹고,단것을 먹어도 안썩고,고통을 주지도 않으며,빠지지도 않는다. 부드럽기 때문에 융통성을 발휘해 말을 할 수 있고 또 이빨처럼 남을 물지 못하니까 경계하는 자도 없다. 부드러워야 오래가고 발언권이 세지고 최후의 승리가 보장되는 것이다.」<원자력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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