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재미 위주로 흐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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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교양·지식 습득에서 오락 쪽으로 독서 경향이 급선회하고 있다. 학술·교양 서적을 찾는 일반 독자들의 발길은 줄어들고 유머 집·추리소설·실용서 등 가벼운 읽을 거리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고학력자간에도 어려운 책 읽기를 기피하고 재미나 실용적인 정보를 얻기 위한 편의주의적 독서가 대세를 이루게 됐다.
동구 공산권의 붕괴 이후 시작된 이념 서적의 퇴조 현상이 학술·교양 서적에까지 빠르게 확산된 것이다.
전국 국·공립도서관에서 1권씩만 구입해도 쉽게 소화될 초판 1∼2천권이 재고로 쌓이고, 나온지 2년만 지나면 찾는 독자가 거의 없어질 정도로 학술서의 수명은 짧아졌다.
이 때문에 자구책을 찾아 나선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은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거나 신간총수와 초판 발행 부수를 줄이고 전문학술서 발행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되고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라즈니쉬의 수많은 담론 집 가운데서 그럴듯한 잠언만 골라 짜집기한 『배꼽』은 2년 동안이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면서 밀리언셀러가 됐다.
『양들의 침묵』, 『쥬라기 공원』등 외국의 추리 소설이 수십만권씩 팔리고 『컴퓨터는 깡통이다』처럼 10만부 이상 팔린 실용서도 드물지 않게 됐다.
불황에 허덕이는 출판계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저질 유머집의 범람. 「최불암 시리즈」 11종, 「맹구 시리즈」 4종, 「노사연 시리즈」 3종, 「대발이 시리즈」 3종에 『캠퍼스 유머 여행』, 『사회주의가 뭐 길래』, 『화장실에서 보는 책』 등 최근에 쏟아진 것만 30종에 가깝다.
대부분 인기 TV 프로그램의 말장난을 모방했거나 인기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한 난센스 성 억지 웃음거리를 모은 것들인데도 짧은 기간 안에 적게는 수천권에서 많게는 수만권씩 팔려 나갔다.
을지서적은 모든 종류의 유머 집을 저속하다는 이유로 전량 반품 처리했고, 「노사연 시리즈」 중 『나도 알고 보면 괜찮은 여자예요』 (모아 간)와 『언니 다들 왜 그러지』 (산울림) 등 2권은 특정 개인의 인격을 모독한 부분이 많아 종로서적에서도 판매를 거부했다.
『나도 알고 보면…』을 낸 모아 출판사는 노사연씨로부터 명예 훼손으로 고소되기도 했다.
출판인들은 이처럼 가벼운 책을 주로 찾는 독서 경향의 변화를 「대량 소비 사회의 일방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출판사·필자의 공동 노력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또 학술·교양 도서의 일차 시장인 도서관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경제 발전 규모에 걸맞지 않게 문화 시설 투자에 인색한 정부가 이같은 소비적 독서 경향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까치 출판사 임종만 사장은 『최근 2년 동안 발행한 30여권의 학술·교양서 중 재판을 찍은 것은 다섯권에 불과하다』며 『지금처럼 초판 2천권도 안 팔리는 상황에서는 단순 재생산마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미국·일본 등도 학술·교양 서적이 안 팔리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단순 재생산이 가능할 정도의 기본 수요는 유지되고 있다는 것.
작년 초부터 초판 부수를 1천권으로 제한한 풀빛 출판사 대표 나병식씨는 『편의주의적 독서 경향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서도 『필자들이 노력하여 통일·민주 개혁 등 우리 사회의 과제를 제대로 풀어낸다면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다』고 전망했다. <최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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