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한·미 FTA 협상, 아쉬웠던 순간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6면

◆관세 협상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이뤄진 모든 관세 협상은 상호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이 경우 그 기준은 관세 인하 품목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관세 인하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얼추 비슷하게 하는 것을 기본(가상의 정확성)으로 한다.

관세 인하 부문에서 미국의 가장 큰 양보가 이뤄진 것은 제주도에서 열린 제4차 협상에서였다. 협상 셋째날 미국은 최장 1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관세를 철폐할 계획이던 1000여 개 품목(총 상품 수 7000여 개)에 대해 한.미 FTA가 발효되는 즉시 관세를 철폐하겠다고 제안했다. 일견 미국이 큰 양보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대미 수출액 기준으로 환산하면 총 수출액 380억 달러의 5% 수준인 19억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일종의 허장성세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에 상응한 우리 양허안도 이런 모양새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상품 양허에 관한 한 우리는 사실상 협상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는 협상을 개시하기도 전에 이미 '관세를 철폐하지 않는 상품의 수를 최소화하라'는 원칙을 세우고 2006년 8월 15일 상품 분야 총 품목의 81.1%에 대해 즉시 관세를 철폐하겠다고 약속해 버렸다. 관세 협상의 기본원칙인 상호주의와 가상의 정확성 등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관세 인하에 관한 협상의 균형은 존재하지 않았다.

◆투자자 정부 간 제소(ISD:Investor-State Dispute)

투자자가 국가를 상대로 제소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중요한 문제라면 그만큼 치열한 협상의 대상이 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2006년 4월 제1차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 미국 측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ISD를 우리 협정문 초안에 포함시켜 미국에 전달했다. 미국과 호주의 FTA에서는 ISD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 ISD로 인해 멕시코가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고려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의문은 왜 한번도 협상하지 않고 이 조항을 선물하듯이 미국에 전달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 협정문 초안에 ISD가 포함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시민단체의 우려가 뒤따르자 정부는 2006년 7월 뒤늦게 이에 대한 민관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ISD의 문제점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순서가 뒤바뀐 셈이다. 더 나아가 통상교섭본부가 정부 관계자와 진행한 일련의 회의에서 건설교통부와 재정경제부.법무부 등도 ISD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제기했다. 이 때문인지 우리 측 협상 당사자들은 제4차 협상에서 간접수용(공적 규제로 투자자 재산권을 간접적으로 침해하는 것)과 관련한 예외 조항의 인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2006년 4월 미국에 제시한 ISD 관련 초안에 이런 예외 조항(반독점 규제, 부동산.조세 정책)을 집어넣었어야 했다. 아니 처음부터 아예 ISD를 빼야 했다. 마지막 통상장관 협상에서 이 조항의 범위가 결정된다고 할 때 다른 쟁점 사항과의 교환을 위해서도 ISD에 대한 예외 조항을 사전에 넣는 게 바람직했다.

◆반덤핑 제도

한.미 FTA를 통해 상품의 관세가 내린다 해도 미국이 반덤핑 제도를 더 강화한다면 미국에 대한 수출이 늘어날 수 없다. 2002년 산업자원부가 국내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의 수출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제도로 거론된 것이 반덤핑제도의 제로잉이었다. 미국은 마이너스 덤핑 마진(수출 가격이 내수 가격보다 낮은 경우)을 제로로 처리하기 때문에 우리 상품의 덤핑 마진이 실제보다 더 높아지게 되는데, 이렇게 제로로 처리하는 관행을 제로잉이라 한다.

제로잉 관행에 대해서는 WTO에서도 협정 위반이라는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쉽게 제도를 고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5차 협상에서 이 요구를 철회했다. "WTO 차원에서 관철할 수 있는 요구사항이라 협상 전략 차원에서 뺐다"고 설명하면서. 그러나 WTO를 통해 반덤핑 제도를 고칠 수 있으면 구태여 한.미 FTA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제로잉 관행뿐만 아니다. 국가별 비합산이나 종료 재심과 같은 것도 관철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무역구제 분야의 법 개정은 있을 수 없다"며 "미 의회에 법령 개정이 필요한 협상안을 가져갈 경우 협정 자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항변.주장을 못했을까. 한.미 FTA가 발효되면 우리는 적어도 15개의 법을 고쳐야 하는데 말이다.

◆협상 목표

"미국을 상대로 이 정도로 한 건 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협상의 평가가 아니다. 협상인 이상 최소한 외형적인 이해득실의 균형은 확보돼야 했다. 이번 협상은 그렇지 못했다. 한.미 FTA를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시장개방'으로 삼은 게 아니라 '체결 그 자체'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인 것 같다. 지나치게 집착하면 협상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김기홍 교수부산대 경제학과 ·협상 컨설턴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