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양성희기자의헬로파워맨] 충무로 최고의 블루칩 송강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송강호(40). 그를 빼놓고 2000년대 충무로 르네상스를 말할 수 있을까. 그로 인해 한국영화는 스타 아닌 배우를 갖게 됐다. 길거리에서 보면 쓱 지나쳐 갈 평범한 얼굴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비범한 연기를 펼쳐보인 그다. 무엇보다 그로 인해 한국영화사는 상처투성이에 고군분투하는 소시민 가장 캐릭터를 추가시켰다. 웃는 코미디 속에서도 그는 어색하게 울고 있었고, 냉혹한 비극 속에서도 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한국 관객에게 페이소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준 배우다.

최근 그의 성가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연기력에 비해 상복이 없었던 그는 '괴물'로 지난달 제1회 '아시안필름어워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기러기 조폭 아빠의 분투를 그린 '우아한 세계'가 개봉 중이고, 다음달에는 그의 첫 멜로이자 이창동 감독의 복귀작 '밀양'이 찾아온다.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촬영에 들어갔고, 이어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기다린다. 숨가쁜 라인업이다. 충무로 최고 블루칩이라는 수사가 나올 만하다. 15일 서울 청담동에서 만난 그는 "본의 아니게 다작 배우가 됐다"며 웃었다.

■ 이창동·박찬욱·봉준호 … 그를 한번 쓰면 또 찾게 된다

#1 그는 명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한 배우로도 꼽힌다. 연극무대에서 그를 처음 캐스팅한 이창동('초록물고기') 감독을 비롯해 그에게 대중적 지표를 넓혀준 박찬욱('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그의 성장이 곧 감독의 성장이었던 봉준호('살인의 추억' '괴물'), 소시민의 얼굴을 씌워준 김지운('반칙왕' '조용한 가족') 감독 등이다.

게다가 모두 두 번 이상이다. 감독들의 신뢰와 애정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감독들 사이에 그는 반복해 찍을 때마다 매번 다른 독창적 표현을 내놔, 버릴 컷이 없는 배우로 통한다. 더 놀라운 건, 다른 컷 중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잘 붙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캐릭터와 상황의 본질을 간파한, 창의적인 연기를 한다는 얘기다.

그런 그에게 신인감독들의 구애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스타 감독 반, 신인 감독 반으로 채워져 있다. "작품을 고를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은 사람(감독)이다. 시나리오 자체보다 감독의 철학, 예술관이 영화를 더 결정하기 때문이다. 기성이든 신인이든 내공에 수긍이 가면 같이한다."

1300만 영화 '괴물'에 이어 신인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를 택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개인적으로 조폭 소재를 싫어한다. 하지만 감독님의 '연애의 목적'을 흥미롭게 봤다. 전형성을 깨는 방식이 좋았다." 그는 아홉 살 아래 한 감독을 꼬박 "감독님"이라고 불렀다. "그게 예의"라고 했다. '생활 누아르'로 불리는 '우아한 세계'는 송강호의 헌신으로 빛난다. 송강호 1인 영화라고 해도 좋다. 밤 출근길 차 안에서 졸고 있는 첫 장면에서부터, 가족들을 외국으로 떠나보내고 혼자 라면 먹는 엔딩에 이르기까지 그 아닌 다른 배우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 고군분투하는 소시민 … 페이소스가 뭔지 보여주마

#2. 소시민의 페이소스란 '반칙왕' 때부터 이어진 것이다. 낮에는 무기력한 회사원이지만 밤이면 마스크를 쓴 레슬러로 변신하는 '반칙왕'에서 관객은 제 얼굴을 봤다. 조폭이어도 하필이면 말더듬이에('넘버3') 범인과의 대결은 백전백패,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살인의 추억'). 독재정권의 천진한 하수인이 돼 아들을 재물로 바치거나('효자동 이발사'), 괴물에 잡혀간 딸을 구하려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였다('괴물'). 하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인생에, 자식을 잃은 아버지였다('복수는 나의 것' '남극일기'). 말하자면 그는 이 시대 고달프게 분투하는 남자의 초상, 보호받지 못한 시민, 상처입은 부성애의 상징이다.

그와 종종 비견되는 동갑내기 설경구가 자기파괴적 에너지로 폭발한다면 송강호의 연기는 차갑고 냉정하다. 박찬욱 감독도 "최민식이 뜨거운 배우인 반면 송강호는 차가운 배우"라고 평한다. 그가 냉정한 배우라는 것은 코믹 연기에서 절대로 '오버'하지 않는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구시렁대는 혼잣말도 작품마다 달라진다.

"'살인의 추억'이나 '우아한 세계'처럼 현장의 사실성을 좇는 영화에서 연기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혼잣말이 나온다. '살인의 추억'처럼 명징한 캐릭터일 때보다 '우아한 세계'처럼 자연발생적이고 극적 요소가 없는 영화일 때 더 그렇다. '밀양' 같은 문학적 영화에서는 혼잣말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전혀 없다."

이런 냉정한 연기는 직관과 본능의 산물이다. 애드립이 강한 그는 명대사도 많이 남겼다. 상황과 캐릭터를 통찰하는 그의 직관적 연기가 아니라면 묻혀버렸을 평범한 대사들이다. '살인의 추억'의 명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는, 뭔가 말을 했으면 좋겠다는 감독의 주문에 끙끙 앓던 그가 현장에서 내놓은 말이다. '우아한 세계'의 도입부 부하 조폭들이 치고받는 모습을 보며 "아름답다. 아름다워" 혀를 차는 장면도 원래는 "지랄한다. 지랄해"였다. 그의 애드립으로, '우아한 아이러니'가 잘 산 명장면이 됐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만드는 직관'의 배우다.

■ 자연인 송강호는 … "취미도 없고 심심한 사람이죠"

#3 자연인 송강호는 어떤 사람일까. 공손하고 매너 좋다. 깐깐한 감독들이 그를 여러 번 청하는 걸 보면 안다. 자신을 낮추지만, 친절함을 가장하기보다 프로 느낌이 강하다. "일과 내가 섞이지 않는다. 연기란, 내가 좋아하고 내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일 뿐 절대적 가치는 아니다. 내가 태어난 이유가 연기라고 말하는 건, 건방진 얘기다."

스크린 속에선 대부분 웃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낯가림이 심하고 취미도 없고 심심한 사람"이라고 한다. "일이 없을 땐 집에 가만히 있는다. 다른 배우에 비해 영화도 덜 보고, 교양이나 지식을 쌓으려 애써 노력하지도 않는 편이다."

그렇다면 연기의 원천은 뭘까. "사회의 흐름을 좇는 데 촉각을 세운다. 사람을 표현하는 게 배우지만, 개개인을 연구하기보다 사회를 통찰하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를 관찰해 연기한다면 그건 묘사지 창조가 아니다. 백 가지 생각을 한 가지로 표현하는 사람이 배우다."

데뷔 11년차. 다양한 장르를 천착한 그가 아직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 있다. 바로 사랑에 빠진 송강호다. '밀양' 얘기를 하면서 그는 갑자기 달뜬 표정이 됐다.

"내가 외모로 관객에게 환상이나 로망을 주는 배우가 아니잖나. '밀양'은 송강호식 멜로다. 멜로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깰 것이다. 내 첫 번째 멜로이자 마지막 멜로가 될지도 모르지만(하하). 단언컨대 한국영화의 정신적 풍요로움을 위한 이창동의 걸작이다. 우리가 왜 영화를 하고 영화를 보는가, 영화인과 관객 모두가 자문하는 영화도 될 것이고."

물론 지금까지의 궤적을 보면 이창동의 걸작은 송강호의 걸작일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 송강호=1967년 경남 김해 출생. 부산 경상대 방송연예과 졸업. 극단 새벽.연우무대. 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 2001년 '공동경비구역 JSA'로 프랑스 도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2007년 '괴물'로 제1회 '아시안필름어워드(AFA)' 남우주연상 수상. 부인과 1남1녀.

글=양성희 기자<shyang@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