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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픽사 창의력+디즈니의 전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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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디즈니라는 이름은 두 갈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애니메이션 역사에 월트 디즈니가 끼친 혁혁한 공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지만, 백인중심주의.극우보수주의 같은 사상적 '전력'에는 대개 존경을 유보하게 되지요.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는 디즈니표 애니메이션 역시 비슷합니다. '인어공주'(1989년)로 화려하게 부활해 '미녀와 야수' '라이온킹' 같은 수작을 내놓았지만, 갈수록 후진하더니 2000년대 들어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반면 픽사는 디즈니의 한참 후배 격이면서도 전 세계적 지지층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토이 스토리'(95년)의 대성공 이후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과 가장 최근의 '카'까지, 참으로 군침 도는 작품을 연달아 내놓았지요. 감독.제작자로 이들 작품을 만들어온 존 레시터는 픽사의 핵심 인물입니다.

지난해 디즈니와 픽사는 한 가족이 됐습니다. 그전에도 픽사 작품을 디즈니가 배급하는 관계였습니다만, 결별설이 나돌더니 주식을 인수해 아예 합병한 것이지요.

이후 첫 작품이 '로빈슨 가족'(사진.19일 개봉)입니다. 픽사의 전작들만큼은 아니어도, 최근의 디즈니 작품 중에는 제일 나아 보입니다. 발명천재인 고아 소년 루이스가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악당 '모자맨'과 이를 막으려는 또래 소년 윌버를 만나는 얘기인데, 3D의 표현력도 수준급이고, 캐릭터가 꽤 재미있습니다.

검은 모자를 쓴 '모자맨'은 말이 악당이지, 능력이 한참 떨어져 미워하기 힘든 인물이지요. 엄청난 대가족인 윌버네 식구들 역시 개성이 특출합니다. 입양 면담에서 수십 번 퇴짜를 맞은 루이스는 이런 가족이 있는 윌버가 부럽습니다. 갖은 모험 끝에 소년이 내적 성장을 경험하는 플롯은 대충 짐작할 만한데, 마지막에 반전(!)이 있습니다. 루이스도 가족을 갖게 되는 거죠. 그 방식이 가슴 짠합니다. 디즈니의 오랜 보수성을 잠시 잊게 합니다.

윌버네 식구들이 진짜 특이한 것은 실패에 박수 칠 줄 아는 점입니다. 대사로 거듭 등장하는 "미래를 향해 도전하라(Keep Moving Forward)"가 이 집안의 가훈이죠. 알고 보니 생전에 월트 디즈니가 한 말이더군요.

기분이 묘했습니다. 픽사를 이끌었던 존 레시터는 '로빈슨 가족'에 총괄제작자로 이름이 올라갑니다. '로빈슨 가족'은 그가 시작한 프로젝트는 아니어도, 그의 이름을 단 첫 번째 디즈니 작품이지요. 레시터가 픽사의 창의력과 감각으로 디즈니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란 건 다들 기대한 바이지만, 그는 먼저 디즈니의 전통에 존경을 표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로빈슨 가족' 앞에는 미키마우스.구피.도널드 덕이 나오는 디즈니의 고전 단편도 잠시 상영됩니다.

늙은 디즈니와 젊은 픽사의 만남은 혁명이 아니라 개혁으로 보입니다. 전통과 선배를 긍정합니다. 애니메이션만이 아니죠. 할리우드는 소재의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수십 년 전 고전을 리메이크하곤 합니다. 역시, 선배란 벗겨 먹으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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