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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계단서라도 발의" 한때 강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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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로써 1월 9일 노 대통령의 제안으로 조성된 '개헌 정국'은 96일 만에 소멸됐다. 이는 연말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 하나가 사라졌다는 의미도 있다.

여기에 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6개 정파 원내대표들의 '개헌 발의 유보' 제안으로 정리되는 듯하던 개헌 문제는 12일 노 대통령이 '당론화' 명시를 요구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한때 갈등 요인으로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13일 의총에서 청와대 측 요구를 전격 수용하면서 물꼬가 트였다. 당초 노 대통령이 정치권의 제안을 계기로 개헌 문제를 정리하는 수순을 염두에 두게 된 데에는 김원기 전 국회의장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의 '정치적 사부'로 불리는 김 전 의장은 "정치권이 합의를 통해 퇴로를 열어주면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는 뜻을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으로 김 전 의장은 한나라당 의원들을 만나 "대선을 앞두고 그쪽에선 변수를 하나라도 줄이는 게 이득"이란 논리를 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정치권의 합의 수준을 문제 삼아 불씨를 재점화한 이후엔 '문재인-장영달-김형오' 라인을 축으로 한 '삼각 교감(交感)'이 주효했다는 얘기가 정치권에서 나온다. 이들의 물밑 접촉에서 노 대통령과 정치권이 '윈-윈'하는 해법이 도출됐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당초 개헌안 발의와 함께 국회 연설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범여권 핵심 관계자는 15일 "노 대통령은 연설문도 작성해 놓았고, 한나라당이 반대하면 국회 정문 앞 계단에서라도 연설문을 읽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개헌 논란은 가열되고 정국은 파란을 겪었을 게 뻔하다.

문 실장으로부터 이런 기류를 전해들은 열린우리당 장영달 원내대표는 "2004년 탄핵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우리는 좋다. 한나라당이 당론화를 끝까지 거부할 작정이냐"며 한나라당 김형오 원내대표를 '압박'했다.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에 과반수 의석을 내줬던 한나라당에 '탄핵의 악몽'을 환기한 것이다.

한나라당도 대선 정국에서 노 대통령이 끝까지 여론전을 펴는 게 유리하지 않다는 계산을 한 것 같다. 김 원내대표는 "노 대통령이 개헌안 발의를 강행하면 우리는 부결시킬 텐데 그러면 또 큰 소리가 날 것 아니냐. 그래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에는 청와대 측의 메시지도 전달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청와대도 이쯤에서 마무리 짓자는 모종의 사인을 당에 보내온 것으로 안다"고 했다.

한나라당의 다른 관계자는 "개헌 당론을 재확인한 의총 이후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청와대 변양균 정책실장 쪽에서 '노 대통령과 김 원내대표가 만나는 자리를 마련할 테니 개헌 발의를 만류하는 모습을 한번 더 보여 달라'는 제안이 있었지만 응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했다. 문 실장은 한나라당 의총 이후 강재섭 대표에게, 개헌 철회 발표를 앞두고는 김 원내대표에게 각각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 정치권 일제히 환영=한나라당 유기준 대변인은 "늦었지만 당연한 귀결"이라며 "노 대통령은 정치적 문제에서 손을 떼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후속 대책 등 산적한 현안 해결과 공정한 대선관리에만 올인하라"고 했다. 열린우리당 최재성 대변인은 "정치권과 대통령이 결단해 의미 있는 합의를 했다"고 논평했다.

김성탁.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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